1791년 6월 20일 늦은 밤, 여섯 사람을 태운 마차가 파리 튈르리 궁을 출발했다. 궁전을 유유히 빠져나가더니 파리 시내를 쏜살같이 질주하는 그 마차는 러시아 귀족 코르프 남작부인의 소유로,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러시아로 귀향할 예정이었다. 마차에 탄 승객은, 코르프 부인, 부인의 두 어린 딸, 친척 로잘리, 그리고 그들을 섬기는 집사와 가정교사였다. 마부가 탈 자리에는 수수한 외투를 걸치고 날품팔이 모자를 쓴,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이 앉아 있었다. 스웨덴의 우수한 지휘관, 로코코 시대 무도회장을 휩쓸던 대귀족,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연인이었던 바로 그였다.
모든 게 사기극이었던 것이다. 코르프 부인은 도주를 위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었을 뿐, 집사와 가정교사는 각각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이 마차는 왕 일가가 혁명의 불온한 기운을 피해 안전한 프랑스 외곽으로 도주하고, 여차하면 외국으로 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도주의 모든 것을 진두지휘한 자는 바로 마부석에 타고 있던 페르센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은 왕실의 운명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 루이 16세 일가의 이 위태로운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긴박한 드라마
혁명의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1년, 변장한 채로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튈르리 궁전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도망쳤지만 목적지까지 거의 다 가서는 벽촌 바렌에서 발각되어 굴욕적으로 체포되었고, 증오 속에 파리로 호송되는 최악의 결말을 맞았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바렌 도주 사건’이다.
이 책에서는 사건의 경과를 줄기로 하여, 바렌 도주 사건과 관련한 다양한 인물들의 사연과 저자의 역사적 해석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책 전반이 소설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생생한 묘사로 채워져 있어, 딱딱한 역사서를 읽는다기보다는 마치 로드무비나 추격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기본적으로는 저자의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되었는데, 어떤 한 인물의 눈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눈으로 본 사건의 경과가 자연스럽게 교차되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저자는 도망자와 추격자, 그리고 협조자들의 시선으로 사건을 읽어나간다. 망명해서 외국 군대를 등에 업고 혁명파를 분쇄하려는 마리 앙투아네트, 사랑하는 그녀를 지키려고 도주 계획을 고안해낸 페르센, 안전한 지역으로 피해 왕당파를 끌어모으려는 루이 16세, 도망친 왕가를 붙잡으려는 두 대륙의 영웅 라파예트, 눈에 불을 켜고 추적하는 열렬한 자코뱅파 드루에……. 도망치려는 자, 살리려는 자, 잡으려는 자, 죽이려는 자까지. 각기 다른 목적을 품은 그들의 의지가 프랑스의 외딴 시골, 바렌에서 충돌한다.
나카노 교코가 밝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진면모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설, 만화, 영화, TV드라마,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들에 정기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다. 어떤 역사 인물이 대중문화로 각색되는 데에 있어, 위대한 업적이나 모범적인 품행보다 중요한 것은 인물의 인생이 담고 있는 극적인 드라마일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황실의 공주로 태어나 파리 단두대에서 처형될 때까지 화려하고도 비극적인 드라마들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을 매료하는 것은 페르센과의 사랑 이야기이다. 그들의 사랑은 앙투아네트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베르사유 시기부터 가장 비극적인 죽음의 날들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바렌 도주 사건은 이 사랑이 만들어낸 가장 극적인 드라마라 할 수 있다. 페르센은 사랑하는 연인을 살리기 위해 이 탈출에 자신이 가진 모든 걸 걸었고, 앙투아네트는 사랑하는 연인을 믿고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왕실의 운명까지 걸었다.
이 사건을 한 편의 역사드라마로 묶어낸 이는, ‘무서운 그림’ 시리즈로 이미 국내에도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작가 나카노 교코다. 그녀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앙투아네트 평전의 일본판을 직접 번역할 만큼, 오랫동안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져왔다. 앙투아네트가 남긴 많은 드라마 중에서도 특히 바렌 사건에 개인적으로 끌렸다는 나카노 교코는 최근의 연구와 자료들을 모으고 거기에 자신의 스토리텔링을 가미하여 도주 24시간을 재현해냈다.
사건으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시대를 살고 있는 독자들은 이 도주가 어떻게 끝나리라는 것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바렌 도주 사건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야기의 결말에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사라는 스포일러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끈을 쉽게 놓아버리기엔, 이 책에 등장하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너무나 가련하고 사랑스럽다.
“불행 속에서야 겨우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화려한 봄날을 지나와 이제 불행하게 될 일만 앞둔 앙투아네트가 편지에 쓴 문장이다. 이 책에서는, 사치스럽고 철모르는 베르사유의 왕비가 아닌,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된 성숙한 여인으로서의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날 수 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직접 하지도 않은 말 뒤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진면목이 나카노 교코의 애정이 담긴 서술을 통해 드러난다.
★책 속에서★
바렌에서의 실패는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를 단두대로 이끄는 결정타가 되었다. 도망을 포기했더라면 혹은 성공했더라면, 역사의 흐름까지는 달라지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마지막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p28~29)
페르센은 달랐다.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유지와 루이 16세의, 더 나아가 왕비의 안위였다. 그녀가 다시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것,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살아남는 것, 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터였다. (……) 단지 사랑의 힘만이 그를 이끌었을 뿐이다.(p40~41)
‘두 대륙의 영웅’이라는 별명을 가진 서른세 살의 지휘관은 행동력이 발군이었다. (……) 자신의 권한 밖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이 책임을 지기로 하고 추적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부하를 모아놓고 라파예트는 이렇게 말했다.
“왕의 가족이 반혁명파에게 납치되었다. 지금쯤 마차로 국경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 길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속도를 낼 수 있도록 한 사람씩 말을 타고 지금 당장 모든 도로, 샛길로 쫓아가서 왕을 되찾아오도록.”(p129~130)
“그렇다. 짐이 국왕이다. 여기 있는 이들은 왕비와 가족이다.”
이렇게 말하면 모두가 데스테처럼 무릎을 꿇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자를 벗고 공손히 인사한 자는 소스를 비롯하여 대여섯 명뿐이었고 드루에와 다른 여러 사람들은 적의를 숨기지 못했다. 드루에가 말없이 방을 나선 뒤로 다른 이들도 차례차례 계단을 내려갔다. 곧 밖에서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드루에가 사실을 전한 것이다. 군중이 불어났는지 함성이 더욱 컸다.
연극은 끝났다.(p256)
방에 있던 사람 모두가 왕의 한심스러움을 말없이 비난하고 있을 때, 긍지 높은 왕비는 놀라울 만큼 스스로를 억제했다. 초조해하고, 절망하고, 체념한 뒤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그것은 신하가 왕을 경멸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완고한 결의였다. (……) 왕은 가족 때문에 하는 수없이 이러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우유부단한 왕을 감쌌다.(p283)
뒷날 나폴레옹은 바렌의 영웅 드루에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세상을 뒤엎었네.” 그 말대로 드루에가 없었다면 역사에 새겨진 바렌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부패한 왕정에 맞서 이름도 없는 민중이 거둔, 어떤 의미로는 극적인 승리였다.(p295~296)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늘날까지도 여성들을 매료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니라 페르센이 사랑했던 여자였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그녀가, 남성 역사가들이 적은 대로 ‘낭비벽이 심하고 놀기 좋아하는 어리석은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면, 어째서 페르센과 같은 (……) 남자의 마음을, 이토록 오랫동안 강하게 붙들어맬 수 있었을까? 종래의 앙투아네트 상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없었다면 그녀를 목숨 걸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리 없다.(p315~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