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부터 춤추다 연습실 구석에서 눈물을 닦는 소녀들,
스타를 만들어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매니저들,
손에 만져질 듯 꿈틀대는 연습생들과 소속사의 갈등
눈이 멀 듯 화려하고 치열한
K팝 산업 뒤에 ‘인간’이 있었다
“빛나지 않는 별이 될 바엔 존재하지 않는 게 나아요”
스타를 꿈꾸는 소녀들은 독기를 품어야 했다
길게는 5년, 적게는 1년 가까이 연습생으로 살고 있는 아홉 소녀들의 일상은 단순했지만 혹독했다. 저자는 스타를 꿈꾸는 이들이 치러야 하는 잔혹한 대가를 현실 그대로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들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문이 꼭꼭 닫힌 연습실에서 같은 노래와 춤을 반복했다. 과도한 다이어트로 병원에 실려가는 일은 아주 흔해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실력이 늘지 않으면 언제든 방출될 수 있었기에 한시라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연습생 생활을 묵묵히 기다려주는 가족들에게는 언제나 죄책감을 느꼈다. 꿈에 그리던 데뷔를 했지만 인기가 곧 돈이고 스타의 말이 법인 세계에서 소위 ‘뜨지 못한’ 멤버들은 순위 스트레스와 대중의 조롱에 시달렸다. 거의 맨몸으로 카메라 앞에서 교태를 부려야 했고, 전국의 행사장을 떠도는 유랑극단 신세가 되기도 했다. 소녀들은 스스로 독해지지 않으면 이러한 상황들을 견딜 수 없었다.
케이팝이 성공하게 된 데는 몇 가지 개성에 기댄 바가 크다고 저자는 말한다. ‘듣는 음악’이 아닌 ‘보는 음악’인 점, 중독성 있는 후크송을 내세운 점, 대중이 싫증을 느끼지 않게 최적화된 멤버로 시장에 나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런 까닭에 어린 소녀들은 완벽한 무대를 위해 연습을 멈출 수 없었고, 인기 작곡가의 후크송에 의존해야 했으며, 대중의 기호에 맞춰 살을 빼고 노출을 감행했다. 저자는 소녀들 역시 스타가 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대중들의 욕구에 순응한 면이 있다고 지적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가 너무나도 잔혹했고 그녀들이 흘린 무수한 땀과 눈물을 보았기에 나인뮤지스의 노래와 춤을 마음껏 즐길 수 없었다고 말한다. 딸을 가진 아비가 되고 나서야 야한 의상을 입기 힘들어하는 멤버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대상은 저자 자신이었다고 고백한다. 저자의 이러한 이야기는 과연 우리들이 걸그룹 소녀들을 그동안 어떤 눈으로 바라봐왔는지, 그녀들을 어떤 또다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지, 소비하는 대중을 벗어나 비판적 입장에 서보게 한다. 그리고 스타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현실적인 조언과 연민 어린 공감의 목소리가 되기도 한다.
◇◇ 걸그룹 멤버들의 목소리 ◇◇
“기억이 잘 안 나요, 하하. 언제 밥을 먹었는지 모르겠어요. 되게 오랜만이네.”
“노출 콘셉트가 너무 싫어요. 제 몸을 남들 앞에 드러내는 게 수치스럽거든요. 가수는 노래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런 불만을 가진 제가 이상한가요?”
“내가 이 일을 하기로 맘먹었으면 환상 속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아요. 어서 어른이 돼야죠. 마음에 굳은살이 필요해요. 더러운 세상,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연예인은 스타가 되면 언제든 떠나버리는 냉혈한”
무자비하게만 보이는 매니저와 사장에게도 눈물은 있다
저자가 1년간 함께 부대끼며 지켜본 매니저들은 ‘악어의 눈물’뿐 아니라 ‘낙타의 눈물’도 지닌 이들이었다. 수없이 쏟아지는 아이돌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멤버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면서도, 마음속에는 힘든 시간을 함께 견뎌온 그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매니저들은 매일같이 밤샘 회의를 하고 방송국 곳곳을 누비며 열심히 일했지만 언제든 자신을 떠나버릴 수 있는 스타들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담당연예인에 대한 헌신과 생존을 위한 냉정함 사이에서 매일 줄타기를 해야 하는 그들의 삶 역시 많은 상처를 안고 있었다.
<나인뮤지스: 그녀들의 서바이벌>이 국내 극장에서 상영되고 국제영화제에 초청될 때마다 매번 빠지지 않는 질문이 신주학 사장에 대한 것이었다고 저자는 밝힌다. 스타제국의 신주학 사장은 독단적인 일처리로 자주 비판을 받았지만, 위기의 순간마다 소속 연예인들과 매니저들이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수장의 면모를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비록 스타 메이킹에만 혈안이 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성공과 실패가 단번에 판가름 나는 케이팝 세계에서 분투하는 그 열정과 노력에 저자는 혀를 내두른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괴로워하고 화내며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다그치는 신주학 사장의 모습에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 매니저들의 목소리 ◇◇
“매니저 일을 가슴으로 배우세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많을 겁니다. 사람 다루는 일이 어떻게 수학 공식 같겠습니까. 주먹구구 같아도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케이팝을 세상에 알린 겁니다.”
“이 친구들은 모르지만 저희는 매번 회의를 통해서 쏟아져나오는 가수들 속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해요. 이 아이들한테 애정이 없었으면 이런 얘기도 안 했을 거예요.”
“우리가 너희들 몸종 되려고 태어났어? 억울하면 떠! 그때는 내가 대우해줄게!”
“나약한 애보다 독한 애가 있어야 팀의 분위기가 바뀝니다. 멍청하게 굴다가 나중에 제가 버림받는 것보다는 나아요.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눈이 멀 듯 화려한 케이팝의 세계도
결국은 ‘사람’이 이끌어나가는 것
2014년, 걸그룹 ‘레이디스 코드’의 교통사고 소식은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1위를 해보는 것이 소원”인 소녀들은 급한 일정에 쫓기다 마음껏 빛나보지도 못하고 스러졌다. 나인뮤지스 역시 도로 위 아슬아슬한 전력질주를 피할 수 없었다. 제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매니저는 밤새 달려야 했고, 그러다 사고를 당한 멤버들은 붕대를 감고서도 연습을 멈출 수 없었다. 한편 그들이 처한 또다른 위험은 ‘멤버 교체’였다. 기획사측은 언제라도 실력이 부족한 멤버를 교체할 수 있도록 예비 멤버를 모집했고, 눈 밖에 나거나 스스로 견디지 못한 멤버는 그룹을 떠나야 했다. 저자가 당시 취재했던 나인뮤지스 멤버 중 지금도 활동하는 이는 세 명뿐이다. 어린 소녀들은 막대한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온갖 위험을 감수하며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고, 시장과 대중의 평가에 따라 기계 부품처럼 취급당했다. 케이팝 세계에서 사람은 유한하고 그룹은 영원하다는 저자의 비판에서 자유로운 대한민국 아이돌은 드물 것이다.
저자는 케이팝 시장이 압축 성장한 한국 사회를 빼닮았다고 말한다. 전 세계를 호령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커졌을지는 몰라도 제대로 된 시스템 구축 없이 인적 노력으로만 이끌어왔기에 그 방식의 잔혹함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가요계뿐 아니라 국내 대중문화 산업으로 그 담론을 확장할 수 있다. 저자는 케이팝의 눈물과 독기 어린 분투를 드러내 보여주면서, 케이팝 시장이 큰 팽창을 이룬 이 시점에서 반드시 짚고 되돌아봐야 할 문제들을 우리 앞에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