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거 들어본 곡인데…”
삶의 어느 순간 만난 그 영화, 그 음악!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이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클래식 음악 선율에는 익숙한 편이다. 카페나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클래식 음악이 흐르면 정확한 곡명은 대지 못해도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곡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잦지 않은가. 클래식 음악은 의외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중에서도 영화를 통해 만나게 되는 클래식 음악은 각별하다. 영화 속 클래식 음악은 주인공의 복잡한 심사를 절절하게 전해주기도 하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를 압축해 보이기도 하며, 결정적 장면에서 감동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클래식 음악을 소개하는 <시네마 클래식>을 읽다 보면 무심코 지나쳤던 음악이 매우 세심하게 선택되어 그 장면에 입혀졌다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치게 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국내 일간지 기자로서 오랫동안 클래식 음악 현장을 누벼왔으며 이미 네 권의 클래식 음악 관련 책을 쓴 지은이는 이번 책에서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삶의 어느 순간에 만났던 영화 속의 클래식 선율을 다시 찾아” 나선다. 지금은 클래식음악 전문 기자로 꽤 이름을 알린 지은이는 대학 시절 학업을 작파하고 하루에 세 편 이상 영화를 보며 ´시네 키드´로 지냈던 전력이 있다고 한다. 140편 여의 영화를 보고 또 보다가 그 학기 올 F를 맞았고 머리 깎고 군대에 갔다. 지금도 대학 졸업을 못하는 악몽을 꾼다는 지은이는, 하지만 그 덕분에 영화와 클래식 음악 모두를 버무린 책 한 권을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이나 줄거리, 주제를 설명하는 가운데 영화에 쓰인 클래식 음악을 소개하면서, 왜 그 영화에, 그 장면에 그 클래식 음악이 쓰였을까를 설득력 있게 해설해준다. 책에 소개된 영화는 모두 32편.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영화는 조금이라도 안 쓰인 영화를 오히려 찾기 힘들 정도로 수도 없이 많다. 그 가운데 지은이는 클래식이 특히 인상적으로 쓰인 영화를 골라냈다. 여기서 지나치게 난해한 예술영화 그리고 음악이 주인공인 음악영화는 되도록 피하고자 했다. 클래식 음악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클래식 음악이 사용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아마데우스」 같은 영화는 그래서 리스트에서 빠졌다. 마틴 스코세이지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는 32편 중에 중복되어 등장한다. 그만큼 그들의 영화에서 클래식 음악이 중요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작곡가로서는 차이콥스키가 가장 많이 눈에 띈다. 지은이의 선호가 짐작되는 부분이다.
32편의 영화 속 클래식 음악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의 스토리와 인상적인 장면 덕분에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또 반대로 영화와 잘 맞아떨어지는 클래식 음악 덕분에 영화의 주제가 더욱 절절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제 클래식 음악은 더 이상 지루하거나 어려운 ‘너무 먼 당신’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더할 나위 없이 알맞게 쓰인 바로 그 음악이 된다.
각 글의 첫머리에는 QR코드를 삽입해 본문에서 다룬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영화의 일부 장면이나 해당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스마트폰을 켜고 QR코드를 읽힌 다음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또 각 글 마지막에는 소개하고 있는 클래식 음악을 따로 감상하고자 할 때 도움이 될 음반/DVD를 추천하고 있다. 수많은 음반의 홍수 속에서 길잡이가 되어줄 만하다.
1장 ´주인공의 심경을 들려주는 클래식´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주인공의 심리 상태나 성격을 더 잘 부각시키고 증폭시키는 장치로 쓰인 영화들을 다룬다.
부호 에드워드 루이스가 거리의 창녀 비비안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귀여운 여인>에서, 에드워드가 비비안을 데려가는 클래식 공연이 사교계의 꽃 비올레타가 신분차를 넘어선 사랑을 꿈꾸다가 좌절하는 이야기을 담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비안은 이탈리아어 노랫말을 하나도 모르니 졸지나 않을까 걱정하지만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을 받는다. 비비안이 우는 것은 베르디의 아름다운 선율 때문만이 아니라 실은 비올레타의 비극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 때문이다.
영국 왕 조지 6세의 이야기를 다룬 <킹스 스피치>에서는 여러 클래식 음악이 사용되었지만 조지 6세가 말더듬증을 이겨내고 국민들을 상대로 전시 라디오 연설을 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이 흐른다. 언뜻 보면 엇나가는 선택이다. 베토벤은 평생 공화주의를 믿었고 영화의 배경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적국인 독일의 음악적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 역경을 극복해낸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베토벤과 조지 6세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물론 비장한 그 장면에 매우 잘 어울리는 선곡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2장 ‘영화의 주제를 암시하는 클래식’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단순히 배경음악이 아니라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를 묶었다.
영화 「필라델피아」는 상당히 긴 시간을 할애해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 가운데 아리아 ´돌아가신 어머니´를 마리아 칼라스의 음성으로 들려준다. 이 아리아는 에이즈로 죽음을 앞둔 주인공에게 위안을 주는 역할을 하지만, 여기서 이 곡이 선택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화의 제목이자 배경이기도 한 필라델피아는 1776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 13개 주가 독립선언서를 승인한 곳이고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는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다. 여기에 동성애 때문에 해고된 변호사가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영화의 줄거리가 겹친다. 동성애자라는 영화 주인공의 정체성이 프랑스혁명(음악), 미국독립전쟁(장소)과 맞물려 삼각대를 형성하며 ‘인권’이라는 강렬한 주제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룬 유일한 ´음악영화´인 <마지막 사중주>에서는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이 핵심적으로 쓰였다. 영화의 원제인 ‘A Late Quartet’에는 한국에서 번역된 ‘마지막 4중주’라는 뜻도 있지만 이외에도 ‘후기 4중주’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영화의 주인공들인 ‘푸가 4중주단’의 단원들이 마지막으로 함께 연주하는 ‘마지막’ 사중주이기도 하지만, 그 연주곡이 바로 베토벤의 ‘후기 4중주’인 14번을 지칭하기도 한다. 전체 7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의 연주시간은 40여 분이며, 베토벤은 이를 중간 휴식 없이 이어서 연주하도록 했다. 이는 삶에 대한 훌륭한 비유가 되기도 한다. 긴 연주 시간 탓에 연주가 진행될수록 악기의 음정은 미묘하게 어긋나기 마련이지만 불가피한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멤버들은 호흡을 맞춰야만 하는 것이다.
3장 ‘결정적 장면에 흐르던 클래식’에서는 어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바로 영화가 연상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 속 클래식을 다룬다.
<지옥의 묵시록>의 초반에 미군들이 헬리콥터를 터고 평화로운 베트공 마을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을 때 흐르는 곡인 바그너의 ´발퀴레의 비행´은 그런 대표적 예 중 하나다. 영화에서 음악과 함께 들리는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음마저도 원래 곡에 포함된 소리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전한다. 박찬욱 감독의 대표작 <올드 보이>의 유명한 장도리 신 직전에 주인공 오대수가 자신을 감금한 철웅을 찾아가 장도리로 이를 하나씩 뽑으며 고문하는 장면 또한 음악 덕분에 더욱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된다. 바로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이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시대연주가 아닌 정경화 버전의 ´사계´를 사용해 깨끗하고 차가운 겨울 이미지를 강렬하게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