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의 돌 속에 묻은 사랑의 노래, 정일근의 다섯번째 시집 출간
개성적인 시세계를 일궈온 중견 시인 정일근의 다섯번째 시집. 총 82편의 시로 구성된 정일근의 『경주 남산』은 섬세한 감성과 조탁의 언어가 경주 남산의 천 년 세월과 함께 어우러져 시로써 담보할 수 있는 삶의 절정을 선연히 보여주는 시집이다. 이끼 낀 푸른 돌 속에 잠긴 사랑이 그의 시 편편마다 신라 천 년의 바람에 실려 아련히 전해온다. 그의 시는 사색의 깊이와 서정의 힘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참으로 개성적인 세계를 창출하고 있다. 정일근 시인은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경남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4년 계간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했고,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처용의 도시』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바다가 보이는 교실』이 있다.
순정(純情)과 불멸(不滅)의 사랑-서정시의 한 아름다운 풍광
‘경주 남산’은 시집 1부의 시들에 붙은 부제에서 따온 것이다. 이 ‘경주 남산’ 연작시는 세월의 지층에 묻힌 순수 절대의 사랑을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서정의 힘과 놀라운 시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한 빼어난 시편들이다. 서지월 시인이 이 연작시를 통해 시의 정수를 독파했노라고 극찬했듯이 ‘경주 남산’ 연작시는 그야말로 서정시의 한 아름다운 풍광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경주 남산에 불어오는 천 년 세월의 바람에서 시인은 불교적 사색과 우주적 명상을 함께 곁들이며, 한편으로는 신비롭고 또 한편으로는 순금처럼 맑은 사랑을 담은 여러 편의 노래를 길어올린다. 시인은 탑도 절도 사라진 신라 사직의 폐허 위에서 “그리움의 마음”이 만든 길을 따라가며 “돌 속에 숨은 사랑”을 찾는다. 그 사랑은 “남산 돌부처들 볼까 돌 속에 숨어 나눈”(「환(幻)-경주 남산」) 잠깐 꿈속의 몽환적 사랑이며, “내 죽어 받을 사랑의 형벌이 두렵지 않“(「감지(紺紙)의 사랑-경주 남산」)아 천 년의 세월도 견디는 기다림의 사랑이며, “그대 곁에 첨성대로 서”서 “하루 스물네 시간을, 일 년 삼백예순닷새를 그대만 바라보고 싶”(「연가-경주 남산」)은 간절한 사랑이다. 그것은 순정(純情)의 사랑이며, 불멸(不滅)의 사랑이다. 시인이 절절이 노래하는 사랑이란 “그리운 사람의 눈 속으로 뜨는 별”(「연가-경주 남산」)인 것이며, “아름다운 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약속”(「사랑의 약속-경주 남산」)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나는 천 년 전에도 이 길을 걸어가던 / 신라의 사람이었으리”(「길-경주 남산」)라며, 존재를 구속하는 시간의 경계마저 훌쩍 뛰어넘으며 사랑의 완성을 갈구한다.
시의 서정성이 확보할 수 있는 특유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시집
이렇듯 정일근의 『경주 남산』은 사색과 관조의 깊이에서 우러나온 지고지순하고 불교적 색채까지 동반한 선(禪)적인 사랑을 노래함으로써 당당한 서정의 감응력을 자랑한다. 시의 서정성이 확보할 수 있는 특유의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그의 시들은 안도현 시인의 지적처럼 정일근 시인이 “일상의 남루나 현실의 고통을 시인의 눈으로 끌어당겨 빨래처럼 맑게 헹구어 놓는 사람”임을 믿게 한다. 그래서 2부와 3부에 수록된 시들에서 삶의 세속화를 경계하는 시인의 맑고 투명한 시선이 돋보이는 점 역시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