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대표하는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역사적인 시간경험과 시간개념에 대한 이론적 탐색
독일 역사학 이론 분야에서 가장 비중 있는 연구가로 손꼽히는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20년간에 걸친 역작『지나간 미래Vergangene Zukunft』(1979)가 출간되었다. 코젤렉은 이 책에서 시간의 차별화, 즉 자연적인 시간과는 차별적으로 인식되는 역사적 시간에 주목함으로써 역사적인 시간경험들과 시간개념들을 밝히고 그를 바탕으로 근대에 특수하게 드러나는 시간구조의 변화를 구명해낸다. 18세기 중반 이후의 근대에서는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 분리되는 가운데 새로움이 낡음을 지속적으로 청산하면서 경험은 점점 적어지고 기대는 점점 커진다는 것이 그의 테제이다. 역사적 시간체험이 명시적으로 혹은 함축적으로 언어화되어 있는 텍스트들의 고찰로 이루어지는 그의 이론적 작업은 역사적 시간의 이론에 대한 초석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모더니티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시간의식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해준다.
‘지나간 미래’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밝히는 선구적 저작
현대에 관해 가장 널리 퍼져 있고, 가장 신뢰할 만한 관찰방식 중의 하나는 현대를 ‘역사의 시대’로 특징짓는 것이다. 역사에 일종의 존재론적 영향력을 부여하고, 역사의 발전과정 속에 있는 우리의 위상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로지 현대이다. 우리가 현대와 관련하여 후기 국면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사실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러한 가정은 현대의 관점을 특징짓는 역사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코젤렉이 주목하고 있는 역사적 시간의 초점은 바로 이러한 역사개념, 즉 18세기 이후 형성된 새로운 시간의식에 놓여 있다. 역사의 시간화, 시간의 가속화로 특징지어지는 18세기 현재와 그 당시의 미래, 즉 그 동안 ‘지나가버린 미래’가 고찰대상이 된다. 이 책에서 코젤렉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근대(Die Neuzeit)의 새로움은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는 것이다. 미래는 현재나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르리라는 확신 속에서 시간이 갖는 원칙적 동질성이 파괴되고 시간구조 속에서 미래가 차지하는 몫이 불균형적으로 커진다. 따라서 유토피아인 미래를 앞당기겠다는 기대가 불러일으키는 시간의 가속 또한 근대를 규정하는 시간의 중요한 특성이 된다. 코젤렉의 이러한 통찰은 현대사를 풍미했던 무수한 이념과 주의들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로써 우리는 ‘지나간 미래’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역사적 혜안을 획득할 수 있다.
의미론적 분석을 통해 역사적·인류학적 차원을 열어 보이는 새로운 시도
코젤렉이 분석대상으로 삼는 언어 텍스트들은 역사적 시간의 변화에 대해 엄밀한 간접증거를 제시한다. 고대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정치가, 철학자, 신학자, 작가, 잘 알려지지 않은 글들, 속담, 사전들, 심지어 그림과 꿈들까지 그의 연구대상이 된다. 이 모든 자료들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 과거의 경험이 어떻게 소화되었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 예측들이 어떻게 언어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때 ‘역사’개념뿐만 아니라 혁명, 우연, 운명, 진보, 발전과 같이 역사개념을 보충하는 수많은 개념들 또한 분석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의미론적 분석들은 언어사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모든 개념성과 언어행위에 내재하는 역사적·인류학적 차원의 해명으로까지 나아간다.
새로운 역사이론에 대한 老사학자의 준엄한 요구
모더니티 개념의 주요 구성요소는 반복될 수 없는 시간의식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코젤렉은 과거로부터 배워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전통적 입장에 반기를 든다. 시간의 질적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근대의 불가역적 시간성 속에서는 하나의 시간차원이 범례로 기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로써 코젤렉의 이론은 역사적 현상을 항상 동일한 시간이라는 상수로 환원시키는 기존의 사학 연구방법과는 차이를 형성한다. 코젤렉의 역사연구는 역사적 사실들의 연대기가 아니라 역사의 운동구조에서 도출된 역사이론에 바쳐진다. 역사를 역사로 만드는 것은 단지 사료들이 아니라 그것을 언어화해내는 역사이론이라는 것이 코젤렉의 일관된 목소리이다.
“유토피아적 미래계획가의 주의주의적 자기확신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삶의 스승으로서의 역사가 그 가르침을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운동구조에서 도출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현대의 해명에 몰두하는 ‘시간의 장인 Der Zeitmeister’ 라인하르트 코젤렉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은 독일을 대표하는 역사학자 중 한 명이다. 1923년 독일 괴를리츠에서 태어나 보훔대학과 하이델베르크대학을 거쳐 1973년 이후부터 빌레펠트 대학의 사학과 교수로 활동하다가 정년 퇴직했으며 연구집단 ‘시학과 해석학Poetik und Hermeneutik’, ‘역사의 이론Theorie der Geschichte’, ‘현대 사회사 연구모임Arbeitskreis f웦 moderne Sozialgeshichte’등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54년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한 『비판과 위기Kritik und Krise』가 1959년에 출판되면서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개념사라는 방법을 통해 학문분과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분과간 작업을 진행하여 수많은 편저서를 남겼다. 『역사적 기본개념들. 독일의 정치적사회적 언어에 대한 역사사전Geschichtliche Grundbegriffe. Historische Lexikon zur politisch-sozialen Sprache in Deutschland』이라는 방대한 사전의 편집자로 특히 유명하다. 역사가, 문학사가, 언어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그의 편저서들로는 『유럽혁명의 시대Zeitalter der europ둰schen Revolution』(1969), 『역사―사건과 서술Geschichte―Ereignis und Erz둯lung』(1973), 『현대세계의 시작에 대한 연구Studien zum Beginn der Modernen Welt』(1977),『시대문턱과 시대정신Epochenschwelle und Epochenbewu쬽sein』(198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