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고통, 아쉬움과 비판, 자책과 연민, 성찰과 전망.
사랑과 그래도 또 사랑들 사이에서“
박상수의 두번째 평론집. 현대문학상 수상작 수록
한국 시의 새로운 흐름과 활기를 만들어내는 시인이자 그 누구보다 빠르고 섬세하게 세계의 흐름을 시로 읽어내는 평론가 박상수. 『후르츠 캔디 버스』의 소년, 『숙녀의 기분』의 숙녀, 『귀족 예절론』의 신사에 이르기까지. 타고났다, 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시선과 목소리, 읽는 이를 한 번에 사로잡는 매력 넘치는 문장과 리듬은 일군의 시인-비평가와는 다른 독보적인 감각으로 충만하다. 특유의 젊고 예민한 감각, 더불어 한국 시와 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적절한 거리감과 시야를 가진 그가 두번째 평론집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를 펴낸다.
현장비평의 최전선에서 살펴본 2010년대의 시와 시인에서부터 한국 시사(史)를 꼼꼼하게 엮고 이어낸 이야기까지 한 권 가득 풍성하게 담았다. 또한 이 책은 ‘지금의 한국적 현실에서, 시를 쓰고 읽는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를 끊임없이 회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시’와 ‘시대’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탐구한 흔적들을 만나보는 일이기도 하겠다. 무엇보다 그의 평론집은 시를 닮아서, 삶을 닮아서 기쁨도 슬픔도 아름다움도 무거움도 모두 담긴 한 권의 작품집이라 말하고 싶다.
먼저 책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두 편의 짧은 글을 눈여겨봐주었으면 한다. 다정하고 친근한 목소리로 적어내려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마치 편안한 에세이를 읽는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은 물론, 글 속에 소개된 시와 어울릴 법한 BGM까지 추천하면서 기존의 비평서가 가진 엄숙주의를 허무는 파격까지 선보인다. 이는 작가가 “늘 그 작품 안으로 내가 기꺼이 걸어들어가는 쪽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의 연장선상으로, 독자들에게 기꺼이 다가가기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기도 할 테다.
그래, 여름이 너무 길어서 나는 ‘엔꼬’가 되어버린 것 같아. 에레나의 음악을 들으며 이윤설의 시를 읽으며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가는 상상을 해. 아득하게, 아득하게. 지금 “행복하자면 못할 것도 없”을 테지만 가을이 와야 비로소 개운한 얼굴이 되어 또다시 꿈을 꾸어볼 수 있을 것만 같아. 가을이 와야…… 그런 의미에서 속삭여. 모든, 모든 여름에게 안녕을.
BGM: 에레나, <입맞춤의 Swing>
_「프롤로그: 모든 여름에게 안녕을-이윤설의 ‘오버’」 에서 (19쪽)
부드러운 첫 관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박상수만이 감지하고 읽어내는 시-선을 만나볼 차례다. 현대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기대가 사라져버린 시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는 ‘감정 귀족주의자’의 시대를 지나 도래한 한국 시의 새로운 흐름을 날카롭고도 통찰력 넘치는 시선으로 분석해낸 글이다. 단지 시 평론이 시를 논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세계를 읽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변화한 시대감각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황인찬의 시에서 신성(神聖) 혹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일차적으로 그가 ‘하강하는 중간 계급’의 시대적 정서를 자기도 모르게 미적 형상으로 반영하고 가시화해내었다는 사실 때문이지만 덧붙여 그의 시가 역설적으로 바로 눈앞의 현실 외에 다른 것은 없을 것이라는 관점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로 하강할 가능성이 높아진 중간 계급의 집단적 불안과 두려움을 차단하고 위로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제 명백하게 더 나빠질 일밖에 남지 않은 사람에게, A 뒤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신기하면서도 꼭 믿고 싶은 위로가 되는 것이다.
_「기대가 사라져버린 시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2010년대 젊은 시인들의 한 경향」 에서 (58쪽)
또한 최승자와 김혜순의 계보를 잇는 박서원의 시적 언어와 특징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여성 시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쓴 글, ‘식민지 남성성’과 작별해야 함을 고하는 글은 그가 동시대에 반응하는 민감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에 통감하고, 회피하지 않으며 반성적 성찰을 ‘글’로 응답한다는 점에서 더욱 믿음직스럽다.
이제는 정말로 여성의 언어가 광기, 무의식, 공백, 잉여, 히스테리로‘만’ 표현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그동안의 한국 시의 중요한 자산이었던 여성적 언어는 때로 현실에서 고통받는 여성의 실상을 잘 담아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정형화된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을 영원히 기성 질서의 바깥에서, 혹은 열외자의 방식으로, 또는 하나의 증상으로 떠돌게 만들기보다는 이 세계의 구체적 구성원으로서, 실체를 가진 존재로 형상화하려는 일에도 예민한 노력이 필요하겠다는 다짐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기존 서정시의 재현 방식과는 또 어떻게 다르게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병행되어야 한다. 당연하게도 이는 비평의 언어로 성취될 수 있다기보다는 시의 일로 선취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밖에 더 제기될 수 있는 다양한 질문들은 잘 닫히지 않는 상자 안에서, 차후에 대답해나가야 하는 일로 남기기로 한다. 다만 “과연 ‘시’만이 오로지 순수할 수 있겠는가”라는 부정의 변증법만큼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라 믿는다.
_「잘 닫히지 않는 상자-‘문단 내 성폭력’과 ‘향상적 분열의 반윤리성’이라는 문제」 에서 (169쪽)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비평이 필요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감각을 영민하게 포착해 때로는 자신의 시로, 때로는 타인의 시로 세계를 전망하는 박상수. “가보지 못한 세계를 선보이는 작품들 안에서 나는 최대한의 경의와 존경으로, 때로는 순진한 기쁨으로 시를 읽고, 또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 “시에 기대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내고 싶었다.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세계가 있었기에 나는 늘 조금 더 살아보겠다는 희망을 꿈꿀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 이 아름다운 시를 그러니까 세계를 다시 말해 삶을 또다른 말로 기쁨과 희망을, 그 모든 것의 다른 모습이기도 할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움, 시의 수만 가지 이채로움을 노래하는 그의 수만 가지 목소리에 이제 귀를 기울일 시간이다.
■ 작가의 말
너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너는 이런 세계를 가진 존재였구나. 고마워, 세계를 다시 볼 수 있는 기쁨과 고통을 알려주어서. 기다려, 내가 그쪽으로 갈게. 내가 너에게로 가서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나의 마음을 다해 너와 함께 있을게…… 세상에 이렇게나 슬프고 아름다운 것이 많이 있다는 감각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신비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혹은 도시의 거리를 걷다가 문득 떨칠 수 없는 기쁨으로 파르스름하게 나는 불타오르고는 했다. 무수한 작은 싸움들 끝에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만족감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책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순수의 정치’가 아니라 ‘오염의 정치’라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시를 사랑하되 시의 자유와 권능을 너무 믿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 고민 끝에 다다른 나의 잠정적 소결이었다. 시적자유와 권능을 끝까지 믿는 마음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정말 그런 것인지 끝없이 자문해야 하는 것이며, 때로 그 믿음을 너무나 손쉽게 우리 자신의 자유와 권능으로 되돌리는 일은 특히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순수의 이름으로 타인과 삶을 착취할 수 있다. 우리는 더욱 순수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더욱 오염되어야 한다. 덧붙여 나는 시를 도덕화된 윤리의 영역 안에 가두지 않고 미(美)의 관점에서 더욱 폭넓게 해소하는 길이야말로 ‘불가능한 구원’의 기본 조건이자 시의 예술적 가치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_「책머리에」 에서 (9쪽)
유계영과 임승유 모두 상실 이후에도 삶이 지속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가지고 있다. 유계영의 시적 화자는 자신이 처한 삶을 꼼짝달싹할 수 없는 ‘의자’의 상황으로 인식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차게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 확산하는 에너지가 유계영 시를 의연하게 뒷받침하는 배경이다. 유계영은 유머러스한 감각과 상상력의 언어로 이 일을 지속하려고 한다. 한편 임승유의 시적 화자는 절망 속에서도 미래의 가능성을 끝까지 믿으려는 쪽에서, ‘결단코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라든지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끝내 있을 것이다’라는 신념을 작동시켜 문법적 착란을 지속할 뿐만 아니라 역으로 의도적인 문법적 착란을 통해 포기할 수 없는 현실의 의지를 축적하고 생산해나간다. 둘 다 사랑과 영혼의 ‘있음’을 끝내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_「사랑과 영혼의 ‘있음’을 끝내 믿는 일-유계영과 임승유의 언어에 관하여」 에서 (461~462쪽)
슬픈 예감 속에서 이 시는 결국 외롭고 쓸쓸하게 끝날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 모든 기쁨과 슬픔에 자신의 전부를 던져 수만 조각으로 부서졌어도 그것이 유쾌했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시의 끝에, 로키에가 결국 시적 화자의 ‘영혼’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상한 희망으로 끌어올려진다. 사랑해 로키에. 소리내어 마지막 구절을 읽다보면, 거기에 마음을 실어보면, 당신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로키에, 너는 나의 또다른 이름. 나는 더 부서질 테지만 그래도 더 가볼래. 너와 함께라면 나는 더 유쾌해질 수있을 것 같아. 이 삶을 더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BGM: 러블리즈, <지금, 우리>
_「에필로그: 사랑한다, 로키에-최성희의 ‘안녕, 로키에!’」 에서 (4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