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 제한이 없는 시의 세계, 시인 윤제림의 첫 번째 동시집
1987년 봄과 가을에 동시와 시로 각각 등단한 시인 윤제림은 지금까지 광고 기획자로, 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해 오면서 여러 권의 시집을 펴냈다. 『삼천리호 자전거』에서부터 『그는 걸어서 온다』, 『새의 얼굴』까지, 자신의 시집을 “받아쓰기 책”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완보는 차곡차곡 이어져 오늘에 닿았다. 그런 그가 이제 첫 번째 동시집을 묶어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할머니가 전하고 싶은 생각, 돌멩이가 외치고 싶은 소리, 도깨비가 퍼뜨려 달라는 얘기, 냉장고가 참고 있는 말”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 “할머니 할아버지와 손자 손녀가 함께 드나들”어도 좋은 연령 제한이 없는 시의 가게,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의 문을 드르륵 밀어 보자.
"물 구름 나무 한데 얼려 사는" 마음의 마을
물 구름 나무 의좋게 모여 사는
강마을에선
하늘도 되고 강물도 되고 싶은 산들이
하늘도 되고 강물도 되는 게
보인답니다.
파란 햇살 머금고 파랗게 솟는 봉우리
푸른 강물 마시고 푸르게 흐르는 산자락
휘이휘이 삐이삐이
휘파람 부는 저녁 산.
_「물 구름 나무 모여 사는 강마을에선」 중에서
구름처럼 높아지고 싶은 강물은 나무를 타고 하늘로 오르고, 헤엄치는 강물이 되고픈 까만 먹장구름은 초록 빛깔 아름다운 장대비로 내려와 흐른다. 오랜 시간을 두고 일어나는 자연의 순환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고요하고, 땅에선 하늘로, 하늘에선 땅으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마을. 윤제림 동시 속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러한 마음들이 모인 자그만 마을의 모습들이다. “꽃집 미니 트럭은 지금 막 문을 연 약국 앞에서,/ 퀵 서비스 오토바이는/ 아이들로 붐비는 문구점 앞에서,/ 속셈 학원 버스는 길 건너 정류장 시내버스 뒤에서,/ 암탉 한 마리가 그려진 치킨집 꼬마 자동차는/ 골목 끝에서// 사람 하나씩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가려던 길을 가거나/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눈 온 날 아침의 등굣길 풍경(「아침 배달」), “곱게 곱게 내려 쌓이는/ 눈발”을 보며, “먼 산 큰 절/ 대웅전 처마를 고치시고는/ 아주아주 하늘로” 오르셨다는 봉구 할아버지의 “대팻날에 밀려나는/ 구름 나무 하이얀 속살”을 상상하는 시간(「봉구 할아버지 커다란 손」), “너 몇 살이냐” “한 살이다, 넌 몇 살이냐” 강아지 두 마리가 투닥투닥 다투는 소리(「한 살 차이」)가 있는 마을을 거닐며 우리의 마음은 바쁠 도리가 없다.
깨끗하게 비질된 마음으로 조금 더 거닐어 보면 곳곳에 놓여 있는 각양각색의 웃음을 발견하게 된다. “동트는 새벽, 국립공원 매표소 앞”에서 언제나 늦는 거북이를 기다리는 친구들의 정체(「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는 반전의 웃음을 자아내고, 운동회 날 아이들을 바라보는 엄마들 눈에 담긴 “우리 애가 제일 잘생겼다”와 아이들 눈에 담긴 이야기의 간극(「운동회 날」) 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저거 언제 사람 되려나” 할아버지가 삼촌을 보고 혀를 찰 때 의연한 척을 해 보는 할머니의 강아지(「삼촌도 사람이 아니다」)가 전시하는 맹랑함, “모두 무릎을 칠 만큼 멋진 시를” 짓고도 홀라당 잊어버린 아이(「꿈에」)의 귀여운 허술함은 일상의 찌꺼기를 씻어낸다.
바위와 꽃과 귀신과 강아지의 목소리가 적힌 받아쓰기 공책
“귀가 조금 큰 편이라서 그럴까요. 남의 소리를 잘 듣습니다. 잘 들어 주니까, 바위와 나무가 말을 걸어옵니다. 꽃과 구름이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귀신이 와서 수다를 떱니다. 강아지와 고양이가 고민을 늘어놓습니다.”
윤제림 시인은 자신의 시를 “받아쓰기”라고 정의한다. 그의 시가 우리에게 평화롭고 완전무결한 태곳적의 감정을 환기한다면 ‘자연’과 ‘아이’의 비밀스러운 그 말들을 유심히 듣고 그대로 적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끔 그들의 이야기를 잘못 알아듣는다. “물론, 잘못 알아들을 때도 많습니다. 꽃 이름을 혼동하기도 하고, 새의 울음을 노래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기억하기도 하고, 중요한 대목을 빼먹기도 합니다. 안과 밖을 곧잘 뒤집고, 머리와 꼬리를 바꿔 놓습니다.” 그로 인해 생기는 틈과 자리바꿈이 깊이와 웃음을 만들어낸다.
해설을 집필한 이안 시인은 윤제림 동시의 나라를 이렇게 묘사한다. “윤제림 시인의 동시가 부유한 것은 천진으로, 동심으로 받아쓴 것이어서 그렇다. 나라로 말하자면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이 윤제림 동시의 나라이겠다. 소국은 소국(笑國)이기도 하다. 웃음을 빼놓을 수 없다. 작은 규모에 적은 말로, 단순하고 쉽게, 좀 서툰 듯, 좀 더듬는 듯, 그 바탕엔 웃음을 깔고. 소국은 또한 노소(老少)가 어우러지고 소통하는 소국(少國)이기도 하다.”
돈 주고 새로 살 것이 없는 부자 나라
화가 노석미의 굵은 붓질은 윤제림 시의 나라를 눈에 보이는 세계로 적실하게 옮겨 주었다. 「봉구 할아버지의 커다란 손」이나 「겨울 하늘」처럼 그대로만 감상해도 충분한 작품들은 물질로서의 책의 품격을 큰 폭으로 높여 준다. 「운동회 날」, 「별명」, 「삼촌도 사람이 아니다」의 그림은 시의 재미와 유머를 힘차게 풀무질한다. 「누가 더 섭섭했을까」의 단순한 표현은 오히려 시가 품은 철학의 깊이를 그저 그대로 담은 모양이다. 「다섯 살 내 동생들처럼」의 귀여운 할아버지 할머니는 “소국(笑國)”이며 “소국(少國)이기도” 한 이 시집의 에필로그로 맞춤일 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