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기울여 들으라, 고귀하신 그대들이여
라그나로크에 대해 말할 날이 기어코 오는구나
하늘도 대지도 바다도 겁에 질려 끝없이 몸을 떨리라
세상의 모든 사슬이 끊어져 묶여 있던 모든 것들이 풀려나는구나
이리하여 아득한 그 옛날의 예언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지리라
가장 오래 살아남아 인류에 전승되는 이야기의 힘, ‘어린이와 고전’
다섯 번째 이야기, 불과 얼음의 땅에서 발원한 역동의 신화 『에다』
‘어린이와 고전’ 시리즈는 각 지역에 오래 살아남아 전승되어 온 고전을 접하며, 다문화시대의 가치와 감각, 세계시민으로서의 공감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자 기획되었다. 고전의 맛과 향기를 그대로 살린 국내 작가들의 유려한 문체와 당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생생한 그림이 오늘의 독자와 작품 사이의 수천 년 시간의 격차를 좁힌다. 인류 최초의 위대한 문학 『길가메시』, 동양 최고의 대서사시 『라마야나』, 이집트를 대표하는 신화 『오시리스와 이시스』, 중세 유럽 기사문학의 걸작 『니벨룽겐의 노래』에 이어서 새로이 출간되는 이야기는, 북유럽 신화의 결정체 『에다』이다. 이경혜 작가의 긴장감 넘치는 문체로 우리 어린이 독자를 위해 다시 탄생한 『에다』는 신화의 매력을 한껏 감상하기에 가장 적절한 텍스트이다.
우리 주변에 언제나 있어 왔던 신화의 재발견
신의 세상, 인간의 세상을 창조한 지혜로운 최고신 오딘과 묠니르를 든 천둥의 신 토르, 교활하고 장난기 많은 로키 등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이다. 북유럽의 신화는 오늘날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의 서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잘 알려진 영화 <반지의 제왕>이나 게임 <라그나로크> <리니지> 등이 모두 이 북유럽 신화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다. 영어권에서 쓰는 요일의 이름도 북유럽 신들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용맹한 전쟁의 신 티르의 이름에서 화요일(Tuesday), 오딘의 이름에서 수요일(Wednesday), 토르의 이름에서 목요일(Thursday)의 표기를 따왔다.
이렇듯 현대의 생활과 문화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신화이지만 ‘에다’라는 단어 자체는 우리에게 적잖이 낯설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게르만 문화권에서 문자의 발달이 더뎠고 기독교가 위세를 떨치던 시기 박해를 피해 전승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원전은 단 두 권뿐인데, 아이슬란드의 시인 스노리 스툴루손이 1220년경에 시작법서의 형태로 쓴 책과, 이후에 발견된 운문으로 이루어진 오래된 필사본이다. 스노리가 쓴 책을 ‘신 에다’ 혹은 ‘산문 에다’라고 부르며 시로만 이루어진 필사본을 ‘고 에다’ 또는 ‘운문 에다’라고 부른다.
오랫동안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써온 작가 이경혜는 완숙한 필력으로 ‘운문 에다’에 시 형태로 담긴 무녀의 예언을 골격으로 하고 ‘산문 에다’의 디테일과 다른 북유럽 신화의 이야기를 더해 우리 어린이들이 북유럽 신화의 아름다움과 재미를 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에다’를 써냈다.
장엄한 멸망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세계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웨덴, 덴마크 등 북쪽의 황량하고 척박한 지역의 삶을 기반으로 하는 이 신화는 다른 신화들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멸망의 신화’라는 점이다. 첫 장면부터 라그나로크라는 최후의 전쟁을 예언하며 시작된다. 신들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을 다 품는 거대한 나무 이그드라실이 드넓은 대지 위로 불타 쓰러지는 장면을 상상하며 예언의 화자는 눈물을 흘린다. 『에다』의 신과 인간들은 언젠가 모조리 불타 사라질 운명을 앞두고 살아간다. 『에다』가 심연을 두드리는 장엄한 미감을 품고 있는 것은 파멸을 알면서도 묵묵히 그 길을 가는 신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감동 때문이다. 『에다』의 신들은 나날의 삶을 견뎌 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이그드라실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나무의 설정이다. 온 세상을 품는 거대한 물푸레나무 이그드라실은 상상할 수조차 없이 크고 신성하며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세계 그 자체이다. 이 나무가 불타 쓰러지는 모습은 라그나로크의 순간을 더욱 극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지혜를 가진 최고신 오딘의 어리석은 실수들, 힘이 가장 센 토르의 단순하고 일희일비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들, 거인 종족이지만 오딘과 의형제를 맺어 신으로 살게 된 로키의 복잡다단한 성격 등 입체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신들의 면면은 『에다』가 혹독한 조건 속에서도 굳건히 남아 우리에게 전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로서의 힘을 보여 준다.
게르만의 신화와 전설에서 영감을 얻어 수많은 작품을 창작해 온 화가 프란츠 슈타센(1869〜1949)의 삽화 가운데 엄선된 작품들이 새로 채색되어 책에 실렸다. 역동적이며 현실감 있는 화풍으로 당대의 미술계에 새로운 기류를 불러일으켰던 프란츠 슈타센의 그림은 『에다』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한껏 끌어올린다. 경쾌한 색채로 단조로움을 떨쳐, 원작의 생동감은 한 세기 뒤의 독자들에게도 그대로 다가온다.
[줄거리]
과거와 미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무녀가 노래한다. 아무것도 없었던 캄캄한 어둠 속에 서리의 나라와 불의 나라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두 나라 사이를 흐르던 깊고 거대한 계곡에서 거인 이미르와 암소 아우듬블라가 태어난다. 아우듬블라가 핥던 얼음 속에서 모든 신들의 조상 부리가 태어나고 그 아들의 아들이 위대한 신 오딘이다. 오딘은 동생들과 힘을 합해 이미르를 죽이고 그의 살로 땅을, 등뼈로 산맥을, 피로는 바다와 강을 만든다. 인간의 세상 미드가르드, 신들의 세상 아스가르드가 탄생하고 거대한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가지가 하늘을 다 뒤덮는다.
오딘은 발할라 궁전에서 전사자들을 되살리는 신 발키리들과 함께 예정된 최후의 전쟁 라그나로크를 준비한다. 아스 신들과 반 신들의 평화협정으로 모든 신들의 침을 한곳에 모은 항아리에서 크바시르가 탄생한다. 크바시르는 난쟁이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술로 빚어졌기에 그 술은 한 모금만 마셔도 세상의 모든 지혜를 깨우치게 되는 신비한 술이 된다. 오딘은 이 술을 얻으며 더욱 높은 지혜를 갖게 된다. 교활한 로키는 공짜로 성벽을 쌓으려다 제 꾀에 당하기도 하고, 난쟁이들을 속여 신들의 보물을 여섯 가지를 얻어 오기도 한다. 오딘의 아들 토르는 가공할 힘을 지닌 채 온 세상을 돌며 모험을 하지만 망치 묠니르를 잃었다 가까스로 되찾는다.
어느 때부턴가 세상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오딘과 프리가의 또다른 아들 발데르의 죽음을 계기로 종말의 시간이 다가온다. 허무하게 일어난 발데르의 죽음을 되돌리고자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온 힘을 다하지만 결국 헤임달의 뿔 나팔은 라그나로크의 시작을 알리고 격렬한 전투 끝에 세상은 예언 그대로 장렬히 불타 사라진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새로운 대지가 바다에서 솟아오른다. 한 세상의 종말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으로 이어지리라. 이렇게 아득한 옛날의 예언이 다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