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페이 트래버스)의 목소리는 내 목소리와 그리 멀지 않다.
나는 그 목소리가 내 목소리처럼 되지 않게 하려고 아주 많이 노력해야 했다"_ 루이스 어드리크
북이 발견됐다. 채색된 북, 페인티드 드럼이다.“한때 마약에 빠졌다가 간염에 걸린 덕분에 그 늪에서 빠져나온 사람, 옷에 관심이 없어서 해고된 옷가게 매니저, 교육을 받다가 만 미술 애호가, 일기와 습작시만 줄곧 써대는 작가, 끝으로 내 어머니가 오십 년도 더 전에 시작한 재산처분 사업의 동업자”인 페이 트래버스가 발견했다. 페이는 죽은 이가 살던 집에 남아 있는 소유물들을 처분해주는 사업을 어머니 엘시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들의 전문 영역은 아메리카 원주민 유물이다. 그녀 자신이 오지브웨족 혈통이기도 하다. 여느 날처럼 감정을 요청받은 집, 그 집에서 제 스스로 소리를 내는 북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삼나무에 무스 가죽이 위아래를 쌌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상징들이 그려진 북이다.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페이는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에 차 트렁크에 북을 실어 자신의 집으로 가져온다.
오지브웨족 전통에 의하면 북은 매매될 수 없다. 북이 선택한 이들만이 북을 전수하고 계승해나갈 수 있다. 그러니 북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페이는 수소문 끝에 버나드 샤와노라는 노인을 찾게 된다. 북은 아메리카 원주민인 샤와노의 할아버지가 만든 것이다. 샤와노는 할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북의 탄생과 여정에 관한 이야기를 페이에게 들려준다.
버나드 샤와노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만들었던 북을 집으로 가져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의 한 가족에게 불의의 사고가 생기고, 버나드는 북을 울려 가족의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려 한다. 이후 이야기는 다시 페이에게로 돌아간다. 페이는 북이 아픈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버나드 샤와노의 편지를 받으며 자신의 오랜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소설은 무엇보다 북의 이야기이면서, 당연히 인간의 이야기이다.
관계, 상실, 슬픔, 용서, 화해, 질서, 무질서, 연결성의 이야기.” <옮긴이의 말> 중에서
총 4부로 이루어진 소설은, 각 부마다 다른 목소리의 화자가 등장해 각자의 삶을 말하고, 그 삶들이 퍼즐 조각처럼 합쳐져 책장을 마지막으로 덮을 때에야 독자의 머릿속에 북에 대한 총체적인 이야기가 완성되도록 기획된 구성이다. 때문에 얼핏 보면 오지브웨족 고유의 정신과 혼이 담긴 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얽혀 있는 듯하다. 북은 사람들의 슬픔을 치유해주는 오지브웨족의 중요한 유산이다. 하지만 북이 얼마나 아름답고 영험하며 신비한 존재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다면, 즉 북 자체가 중요했다면 그 글은 픽션이 아닌 논픽션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테다. 작가는 북을 울리는 연료가 되는, 사람들의‘슬픔’에 집중한다. 『페인티드 드럼』에선, 다양한 층위의 슬픔이 등장한다. 특수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슬픔이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으로서 겪어야 했던 역사 속의 슬픔-정부가 모든 사람들을 보호구역의 가장 먼 경계 바깥으로, 길로, 시내로, 주택지로 이주시키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에는 괜찮은 듯했지만 곧 일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요한 인물이었던 사람들이 숨지거나 술꾼이 되거나 살해당하거나 자살에 가까운 행위를 하거나 자기몰락의 길을 걷는 듯 보였다(159쪽)-이나, 전쟁과 같은 국가의 폭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처럼.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것과 같이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슬픔도 있다. 관계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사회로부터 얻은 슬픔들. 이렇듯 루이스 어드리크가 그려내는 슬픔은 흔하고도 다양하며 개별적이기에, 옮긴이의 표현대로 슬픔은 “색조를 잃은 무채색이 아니라 찬연한 빛깔의 유채색”(360쪽)일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슬픔이 있지요.
우리가 슬픔을 어떻게든 다루지 않으면 슬픔이 우리를 놔주지 않아요.”
슬픔이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해서 이를 그대로 안고 살아갈 수는 없다.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단순한 질서다. 어느 날, 그리고 다음날, 그리고 그다음날, 우리가 운이 좋다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슬픔은 혼란이다. 죽음과 질병은 세상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북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다. 그 질서 속에서 살아나가고 그 질서를 지키는 것은 절박하게 희망을 갈구하는 몸짓이다. 우리를 보호하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의 마음에서 슬픔을 걷어가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찬미하게 하소서.(239쪽)
우리는 구원을 열망한다. 페이가 살고 있는 길의 이름은 부흥,‘리바이벌 로드’이기까지 하다. 구원을 모색하고자 어드리크는 인간 세상 바깥, 슬픔을 초월한 존재들로 시선을 돌린다. 이 땅에 살고 있으나 다른 종種인 그들을 통해 스스로를 반추하고, 인간 스스로 얻게 된 것보다 더 나은 지혜를 찾고자 한다. 이는 자연과 교감하는 아메리카 원주민 특유의 시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숲에서 올바른 길이란 없고 성장의 법칙 말고 따라야 할 길도 없다. 올바른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버리고 가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라. 이것이 존재 방식이다. 비틀리고 떨어지고 뿌리에서 갈라진다. 한껏 자라기 위해서는 아래의 것을 희생해야 한다. 흰 자작나무는 오래된 솔송나무 속을 먹고 살며 제 목을 서서히 조를 포도덩굴을 먹여 살린다.(41쪽)
거미들은 엄숙한 목표를 품고 참을성 있게 움직인다. 이 우아한 거미줄을 만드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고, 아름다움은 그 목적의 부산물이다. 궁금해진다. 거미의 나날처럼 보잘것없는 내 수많은 나날에서 내 목적은 뭐지? 내가 만드는 건 뭐가 아름답지? 뭐가 우아하지? 세상에 어떤 보탬이 되지? (107~108쪽)
“늑대가 대답했어. 물론 말로 대답한 게 아니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으로. ‘사니까 사는 거야.’ 늑대는 질문을 하지 않았어. 이유를 대지도 않았어. 나는 그때 늑대를 이해하게 됐다네. 늑대는 삶을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지.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삶을 바라지 않아. 인간에게 분노하며 자신들의 생명을 단축시키거나, 더욱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인간을 두려워하지도 않지. 아주 슬기로워.”(164쪽)
혹은, 마찬가지로 인간 세상 바깥, 망자들에게서 힌트를 얻고자 한다. 페이가 죽은 이들의 물건을 접하고 느끼는 행위들은,“비록 무사히 저승으로 갔겠지만 물건의 배치나 그것을 다룬 방식에 아직 남아 있는 죽은 자들의 가치관이나 취향에 대한 느낌을 얻고 싶다. 나는 죽은 자들과 화해하고 싶다.(50쪽)”.“어떤 소장품에서는 인간이 느껴지지 않지만 어떤 것에서는 물씬 느껴진다.”(52~53쪽) 구원을 얻기 위한 치열한 몸짓이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통해 본 ‘구원’
구원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작가는 ‘어머니와 딸’을 서술하는 방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힌트를 숨겨놓았다. 각 부의 중심에는 모녀 관계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더 정확히는 어머니와 그녀의 맏딸이다. 1부와 4부에선 ‘엘시와 페이’, 2부에선 ‘아나퀏과 숄 소녀’, 3부에선 ‘아이라와 쇼니’가 중심축이다. 각각의 관계엔, 들끓는 모성이 없다. 루이스 어드리크는 차라리 “여자라면 어머니와 사이가 좋다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33쪽)라고 단정한다. 소설의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위해 무조건 헌신하기보다 여자로서 자신의 욕망을 좇는 편을 택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 좇는 사이, 자식들에겐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가 찾아온다. 페이와 여동생 네타는 과수원의 사과나무에 위태롭게 올라가 있고, 숄 소녀는 달리는 수레 위에서 늑대들의 습격에 쫓기며, 쇼니는 불타버린 집을 뒤로 하고 동생들을 이끌고 눈보라를 헤쳐나가야 한다.
딸들은 어머니가 부재한 상황에서 위기에서 빠져나오긴 하지만, 상처는 슬픔이 되어 남는다. 페이는 타인과의 관계맺음에서 끊임없이 두려움과 망설임을 경험하고, 숄 소녀는 자신의 몸을 투신해 북이 되며, 쇼니는 어머니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목말라한다. “어머니들은 우리를 보호하려고” (352쪽)하기 때문에, “딸에게 산고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는 것과 같을 테니”(같은 쪽), 위험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피한다. 딸들은 결국 이런 슬픔과 결핍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달아야만 한다.
“삶이 당신을 부숴놓을 것이라고. 그 사실로부터 당신을 보호해줄 사람은 없고, 그것은 혼자 살아도 마찬가지라고. 고독 또한 열망을 자극하여 당신을 부숴버릴 테니까. 당신은 사랑해야 한다. 당신은 느껴야 한다. 그것이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난 이유다. 당신은 심장을 걸고 여기에 있다”(같은 쪽)는 것을. 루이스 어드리크가 『페인티드 드럼』을 ‘딸들에게’라는 헌사로 시작하고 있음이 의미심장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슬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직시하는 순간 딸들은 성장하며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야말로, 나와 타자와의 관계가 허물어지며 비로소 세상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결론을 보여주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만약 그것들이 갈까마귀 묘지에서 죽은 것들을 먹고 살았던 벌레나 생명체를 먹고 그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들을 여기에 묻힌 사람들, 아이들, 자신을 희생한 소녀들의 정령이라고 해도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갈까마귀의 기쁨은 이 땅 위와 이 땅 아래, 그리고 내가 바로 지금 서 있는 여기 그 중간에서 우리가 공유하는 의식意識의 한 형태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갈까마귀 한 마리가 방향을 틀더니 내 얼굴을 향해 총알처럼 날아온다. 하지만 그것이 내 머리칼에 날개를 스치며 지나갈 때도 나는 움찔하지 않는다. 나는 그 야성의 순간에 내 여동생의 이름을 외쳐 부른다. (후략) (356쪽)
추천사
격정 가득한 두려움, 신화적인 이야기, 살아 있는 자들의 숙명을 포착하는 루이스 어드리크의 빼어난 솜씨에 독자들은 숨이 멎을 듯 빠져든다. _뉴요커
윌리엄 포크너와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그랬듯이, 있을 법한 세상을 창조하는 것과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누구도 얕잡아 볼 수 없는 위업이다. 루이스 어드리크는 그 과업을 훌륭히 이루어냈다. _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
파괴와 부활 사이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어느 때보다 예술적으로 흐른다. _워싱턴포스트 북 월드
어드리크는 삶은 곧 변화라는 점을 믿는 작가다. 그리고 변하는 그 삶을 자신의 캐릭터들이 좋게, 혹은 나쁘게, 그리고 다시 좋게 경험하도록 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이 소설의 핵심이다. _보스턴 글로브
어드리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심리와 현대적 가치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몇 세대에 걸친 상실과 그리움을 능숙한 솜씨로 상기시킨다. 『페인티드 드럼』의 문체는 그녀의 시만큼이나 운율이 살아 있다. _피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