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커지는 어떤 ‘힘’에 관한 이야기, 전미화 그림책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외양의 그림책이다. 흰 화면에는 작은 체구의 여자뿐, 모로 기울인 얼굴에 이렇다 할 표정은 없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한 세계의 두둑을 단단하게 다져 온 작가 전미화의 신작 『그러던 어느 날』은 글 없이 진행되는 그림책이다. 재료를 밀어내는 크라프트종이 위에 두텁고 고집스럽게 올라앉은 그림은 인물의 상황과 감정을 가감 없이 발신한다. 요령이라고는 없는 일상, 일자로 다문 입술과 굵은 두 손. 그의 이야기는 어쩐지 나의 것과 닮았을 것만 같은데, 그 끝은 과연 바라 마지않는 나의 소원에 닿아 있을까.
빛 쪽으로 바람 쪽으로 줄곧,
삼각김밥에 단맛 우유로 단출한 점심을 보내는 여자다. 상사의 자잘한 짜증에도 별로 영향받지 않는 멘탈을 가졌다. 퇴근길 대중교통은 언제나 아수라장이고, 흥분과 열기로 소란스러운 밤거리지만 그저 지나쳐 집으로 향할 뿐이다. 미끄러운 광고지 때문이었는지 공사 현장의 허술한 관리 때문이었는지 여자는 예기치 못한 부상을 입고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화분 하나가 배달된다. 용서해 달라는 (아마도) 지난 애인의 편지와 함께. 목발을 짚은 채로 달걀을 떨어뜨렸을 때도 성내지 않고 TV 쇼를 보면서도 크게 웃지 않고 몇 가지 약병이 곁에 놓인 침대에서도 씩씩하게 잠들던 그이기에, 처음으로 주먹을 부르쥐고 눈썹을 꺾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꼴도 보기 싫어 구석에 던져두었지만 축 처진 줄기를 보니 여자는 어쩐지 미안해진다. 볕드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주고 가끔씩 물을 흠뻑 주니 화분은 힘을 내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고 하루하루 몸을 키우는 식물에게 어느새 처음의 화분은 비좁아 보인다. 큰 화분으로 옮겨 주고 나니 작은 화분이 빈다. 사은품으로 딸려 온 씨앗이 있어서 손에 흙이 묻은 김에 그것도 심어 본다. 이럴 수가! 초록은 성실하게도 새 잎을 내었고, 여자의 몸속에 어떤 힘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만화방창한 순간과 우리의 다음 날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필요한 종류의 영양제를 구입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갈색 화분 속 식물의 도톰한 잎들이 유난히 빛났다. 더 좋은 균형을 위해 가지를 잘라내고, 떨어진 가지들을 물꽂이해 새 뿌리를 내고, 화분에 골고루 바람을 쏘이기 위해 여자의 시간과 공간에 질서가 생겨났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꿈을 꾸었다. 훌쩍 트럭을 몰고 떠나기 하루 전날 밤이었다.
붉게 그을린 피부와 덜 정돈된 세간, 굵은 땀을 흘리는 여자의 얼굴은 그 삶의 만개의 순간을 모두에게 알린다. 결국 운이 좋았던 어떤 사람의 특별한 날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은 그 앞의 날들과 그 뒤의 날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접을 수도, 펼 수도 없는 연속된 시간을 우리 모두는 걸어간다. 두터운 흙을 밀어내고 첫 싹이 터진 그날, 돌돌 말린 잎이 탁 펴지던 그날, 여린 순이 뾰록 고개를 내밀던 그날이 오기 전의 하루도, 그다음의 하루도 같은 무게의 ‘오늘’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초록의 식물들이 우리들 가까이 있다.
2009년 『눈썹 올라간 철이』를 시작으로 2019년 오늘까지 작가 전미화는 아홉 권의 창작그림책을 발표하였다. 짧지 않은 시간, 적지 않은 숫자의 그림책을 그는 여러 생명들을 곁에 두고 쓰고 그렸다. 그 모든 갈등과 평화의 시간을 응축한 듯 두터운 힘을 품은 그림이 『그러던 어느 날』의 장면들을 채우고 있다. 단호한 아웃라인과 절정에 이른 자연의 기운을 표현해 내는 색채가 눈부시다. 그의 걸음을 지켜보았던 독자와, 처음 그림책을 접하는 독자 모두에게 강렬한 경험을 선사할 그림책이다.
추천사
지치고 다친 어느날, 주인공 손에는 작은 화분이 쥐어진다. 그리고 그 화분은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작디작은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고 그 나무는 또다른 나무로 자라고 번식하듯, 작았던 한 점의 푸르름이 주인공의 삶과 주변을 온통 뒤덮는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공존이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_이소영(『식물 산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