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46년차 키다리 시인의 새 동시집
고요하다가 아프다가 눈물 나다가 철들다가 쓰인 동시들
등단 46년차 시인 이상교의 새 동시집. 이상교 시인은 동시집과 시집, 그림책, 동화, 손수 그림을 그린 산문집 등 분야를 넘나들며 지금까지 200권이 훌쩍 넘는 책을 펴냈다. 그런 그가 스스로를 일컬을 때 한결같이 쓰는 말은 ‘키다리 시인’이다. 처음 글을 쓰게 한 것이 동시였고, 가장 아끼는 것 또한 동시이므로 시인으로 불리고 싶다는 그. 지난해에는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서도 기어코 새 동시를 써 냈다. 다시 깨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대수술을 받은 직후에도 동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 동시집 『찰방찰방 밤을 건너』는 그렇게 이 세상에 나왔다. ‘시인의 말’에서 말하듯 “고요하다가 아프다가 눈물 나다가 철들다가” 쓴 동시들이 차곡차곡 담겼다. 어떤 작품은 차분한 밤의 빛깔을 띤 채 담담하게 말을 건네고, 어떤 작품은 어둠을 지나고 마주하는 아침처럼 말갛고 환하다. 지난 동시집들과 다른 지점이다.
깊은 잠 가운데
귀만 동동 떠올라
말똥말똥 잠 깬
두 귀.
읽다가 침대 밑으로 떨궈
펼쳐진 책장 위로
벌레 한 마리 기어간다.
여섯 개일지 여덟 개일지
셀 수 없이 더 많은 발일지,
살가락살가락 발소리를
죽여
바삐 걸어간다.
발걸음이 알아차릴라
동동 떠올랐던 두 귀,
잠으로 도로 갈앉는다.
_「잠귀」 전문
고요했던 밤이 수많은 소리로 가득 차
살아난다, 살아난다.
올해로 71살이 된 그가 스스로를 일컫는 또 다른 말은 ‘까칠한 할머니’다. 전혀 까칠하지 않은 말투로 허허 웃으며 난 까칠한 할머니예요, 말하곤 하는데 이상교의 동시를 아는 독자들이라면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 것이다. IBBY 어너리스트로 선정된 전작 『예쁘다고 말해 줘』에 이어 이번 『찰방찰방 밤을 건너』에서도 작고 작은 존재들에 대한 애정이 담뿍 묻어난다. 수많은 길고양이들, 강아지의 꼬리, 토끼의 두 귀와 민들레 곁 피어난 쑥부쟁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다리가 여섯 개일지 여덟 개일지 모를 벌레 한 마리를 방해하지 않으려 숨죽이는 시인의 모습은 따듯하고 온유하기만 하다. 굳이 ‘까칠함’이라 부를 면모를 찾자면, 작은 존재들이 내는 소리, 고요해 보이는 밤의 소리마저 찾아 들을 수 있는 ‘예민함’일 테다.
이상교 시인에게 밤은 소란한 시간이다. 초침이 찰방찰방 시간을 건너가는 소리, 살가락살가락 벌레가 책장 위를 지나가는 소리, 달님이 창문을 넘어와 방바닥에 살며시 희디흰 발을 내려놓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까닭이다. 해가 저물고 하루가 마무리되는, 시작보단 끝에 가까워 보이는 그 시간에 시인은 생동감을 부여하고 새로운 색을 덧입혀 우리를 초대한다. 고요했던 우리의 밤 또한 그렇게 살아난다.
"겨울 강 가운데서 심장은 얼지 않고 뛰고, 좁다란 벽은 벽시계를 달고 새 숨을 얻었다. 멈춘 듯 혹은 죽은 듯 보이는 겨울 강과 좁다란 벽에 심장을 달아 준 시인, 그가 쓰는 시의 심장은 어디쯤일까. 심장이 뛰어 ‘시’라는 맥박이 탄생한 자리, 45년 넘게 바라보고 보듬으며 키워 나갔을 ‘자기다움’의 자리를 조용조용 더듬어 본다. (…) 밤에 보이는 소리를 듣는 시인의 예민한 심장이 두근대며 외치고 있다. 고요했던 밤이 수많은 소리로 가득 차 살아난다, 살아난다."
_김유진(어린이문학평론가, 동시인)
아픔을 견디고 이겨 내는 강인함
켜켜이 쌓인 시간을 지닌 이의 묵직한 힘
지난해, 나는 좀 많이 아팠다.
중환자실에서 팔다리가 묶이고 입에는 인공호흡기가 꽂혀 있었다.
그 무렵, 하늘나라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다.
“철이라곤 들지 않는 키다리 시인이 오면 그 긴 다리로 겅중대며
조용한 하늘나라를 온통 휘젓고 돌아다닐 게 뻔해!”
회의에서 내려진 결론 덕에 나는 하늘나라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퇴원해 돌아온 나는 침대 벽에 잠자코 기대앉아 하릴없이 생각에나 잠기게 되었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밝은 내 귀는 막내 생쥐가 자면서 내는
이빨 가는 소리까지 알아듣게 되었다.
이번 동시집 시들은 그렇게 써졌다.
고요하다가 아프다가 눈물 나다가 철들다가.
_‘시인의 말’ 중에서
「송사리 꿈」은 병상에서 쓰인 대표적인 시다. 할머니의 폐에 물이 찼다는 말을 들은 ´나´는 꿈에서 빠릿빠릿하고 잽싼 송사리 한 마리를 만난다. 잡으려도 잡을 수 없는 송사리는 병마에 잡히지 않고 일어나고야 말겠다는 시인의 강인한 의지가 투영된 존재로 읽힌다. 「할아버지의 공룡」에서는 비쩍 마른 몸의 등뼈를 유쾌하게 풀어냈다. 울툭불툭 불거진 ‘할아버지’의 등뼈는 가냘픔이나 약함의 심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아무도 모르게/ 공룡 한 마리를/ 키우고 계셨다.”라는 마지막 연은 무엇이든 견뎌 내고 이겨 낼 수 있는 단단함, 켜켜이 쌓인 시간을 지닌 이의 묵직한 힘을 보여 준다.
묵은 젓가락에도 숟가락에도 잡히지 않고 파드득파득 달아나 아가미를 달싹이고(「묵」), 조그만 달랑게 한 마리는 파도가 하얗게 달려와도 “덤벼 봐, 덤벼 봐!” 한다(「게거품」). 때로는 몸이 낙엽만큼 가붓해져 날아갈 것만 같아도 “나무의자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어 땅에 단단히 발붙인다(「낙엽」). “맵고 매운 때”를 거친 나무가 매 순간 코에 좋은 냄새를 풍기듯(「나무」), 힘겨운 상황을 이겨 낸 시인의 이번 동시집은 차분하지만 기운차고 힘이 있다. 그 힘을 어린이를 위한 동시라는 그릇에 거뜬히 담아내는 것 또한 이 키 큰 시인만이 지닌 힘이다.
화장실과 다용도실 사이
좁다란 벽에
시계가 걸렸다.
재깍 재깍 재깍 재깍……
벽은 새로 숨을 얻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고른 숨소리.
살아난 벽.
_「벽」 전문
“이상교 선생님은 기억 못 하시겠지만
저는 선생님을 뵙고 큰 위로를 받은 적이 있어요.
시간이 흘러 선생님 책에 그림을 그리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찰방찰방 밤을 건너』의 그림은 그림책 작가 김혜원이 맡았다. 고양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으로 잘 알려진 ‘고양이 시인’과 ‘고양이 화가’의 만남이다. (이상교 시인이 펴낸 『고양이가 나 대신』 『길고양이들은 배고프지 말 것』, 김혜원 화가의 『고양이』 『고양이 이름은 미영씨』 등은 제목만으로도 두 사람의 고양이 사랑을 짐작하게 한다.)
김혜원은 작고 놀라운 생명체를 어여뻐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이상교의 동시를 귀하게 아끼는 마음으로 맑고 따스한 그림들을 살포시 얹었다. 이상교 시인의 전작에는 발랄하고 유머러스한 그림이 어울렸다면, 『찰방찰방 밤을 건너』에는 김혜원 화가의 말갛고 산뜻한 그림이 맞춤옷처럼 꼭 들어맞는다. 수채 물감을 쓴 그림들은 잔잔하고 고요하지만 가만 들여다볼수록 해석의 결이 다채로워 그 깊이가 두텁다. 김혜원 화가가 털어놓은 속 이야기를 보건대, 그 깊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상교’의 시였기 때문에 남다른 애정으로 작업한 덕분이라 여겨진다.
“2011년 가을, 제가 그림을 처음 시작할 때 이상교 선생님의 글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어요. 수업 중 길고양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가 울었어요. 길고양이의 딱한 사정이 가여워서이기도 했지만 제 개인적으로도 심신이 지쳐 있던 때라 복받쳤던 것 같아요. 서른이 훌쩍 넘어서 그림 그리겠다고 직장을 그만두고서 막막했고, 그 당시 길에 버려진 젖먹이 아깽이 세 마리를 돌보던 중이어서 무척 힘들었거든요. 너무 창피했는데 이상교 선생님께서 기억해 두셨다가 그다음 수업 때 눈물값이에요, 하면서 선생님 동시집 한 권을 선물해 주셨어요. 선생님은 아마 기억 못 하시겠지만, 저는 그때 위로를 받았고 마음이 참 좋았어요.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이렇게 선생님 글에 그림을 그릴 기회가 주어져서, 저에게는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_김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