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거나 지는 것 없이 둘 다 힘이 나는 신기한 가위바위보
안진영의 두 번째 동시집 『난 바위 낼게 넌 기운 내』
자기 안의 아이를 응시하는 시인, 그리하여 바깥의 모든 작은 것들과 나란히 걷는 시인 안진영이 새 동시집을 살뜰히 꾸려 우리 곁에 다시 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너와 나를 구체성의 힘으로 생동감 있게 노래했던 『맨날맨날 착하기는 힘들어』에 이어 6년 만이다. 붉게 떠오르는 아침의 첫 해처럼 더욱 뜨겁게 각축하는 감정들과, 오래된 이야기를 숨긴 깊고 차가운 물의 세계를 아울러서 담아낸 이번 동시집은, 길었던 고독을 통과해 어딘가에 먼저 닿은 이가 우리에게 전하는 단단한 응원이자 경쾌한 승전보인 듯하다.
3월과 쉬는 시간과 와글와글 우리들의 손바닥
나는 낯설어야
나는 낯설어 옆에 어색해야
나는 낯설어 옆에 어색해 옆에 솔직히 두려워야
나는 낯설어 옆에 어색해 옆에 솔직히 두려워 옆에 반가워야
나는 낯설어 옆에 어색해 옆에 솔직히 두려워 옆에 반가워 옆에 궁금해야
나는 낯설어 옆에 어색해 옆에 솔직히 두려워 옆에 반가워 옆에 궁금해 옆에 설레어야
나는 기대돼야
우리, 앞으로 잘 지내자
-「첫 만남」 전문
‘자기소개’라는 부제가 달린 시 「첫 만남」을 비롯하여, 살아 있는 아이들의 생명력이 와글와글 육박해 오는 동시들이 우선 우리를 맞이한다. “엄마, 난 그런 애들/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공부 시간인데/ 막 돌아다니고/ 선생님 말하는데/ 같이 막 떠들어 대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고 시치미를 떼는 하윤이는 사실 그 애, 병찬이처럼 “괴굴괴굴/ 폴짝폴짝” “그러고 싶”다(「하윤이 괴구리」). “빨강아, 오늘은 무슨 모자 쓰고 싶니? 파랑 모자? 그래, 그럼. 파랑 모자 써”(「사인펜 정리하기」) 하는 민준이의 너그러운 마음씨는 사실 그렇게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미정이가 읽어 보라며/ 내게 빌려준 책/ 76쪽과 77쪽 사이에 있던,” 쪽지를 두 주 만에 발견하고 꿈만 같은 기분에 빠졌던 어느 날(「쪽지」), “오늘은 나,// 세상에 없는 듯 조용히 있고 싶어”(「까만색 크레파스」) 선언하고 검은 장막 뒤로 숨고 싶던 날들이 저편에서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서두르지 않을래 날개를 충분히 말리지 않으면 안 되니까
해설을 쓴 이안 시인은 『난 바위 낼게 넌 기운 내』의 세계가 『맨날맨날 착하기는 힘들어』의 시적 주체가 “멀쩡한 길”(「소풍 가는 길에서」)과 “오늘 하루 행복”(「민들레꽃의 하루」)하기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데서, 그러니까 “내리는 눈을 고요히 바라보다가// 이내 눈밭으로 달려’(「첫 경험」) 나가는 자리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과연 시인이 공들여 직조한 그물로 붙잡아 올린 세상의 순간들, 그것이 품고 있는 감정의 울림은 높고 깊은 진폭으로 읽는 이를 휘감는다. “새벽/ 우리 동네 목욕탕 앞”에서 일을 끝내고 씻으러 오던 삼촌과, 다 씻고 목욕탕을 나서던 아빠와 내가 만나 인사하는 장면을 “목욕탕 앞에서/ 하루의/ 시작과 끝이/ 빠이, 빠이// 손을 흔들었지”(「목욕탕 앞」) 하고 노래하는 건강함, 마늘밭을 헤집어 놓는 두더지를 원망하는 대신 “동사무소에는 땅 주인이 나로 되어 있지만,/ 어딘가엔 두더지로 기록되어 있을지 누가 알아?/ 마늘 열 개 심어서 다섯 개만 먹자, 마음먹으니까 좋아./ 내 마음에 없으니까 없지 두더지가.”(「없으니까 없지 두더지」) 하고 일어서는 여유로움은 우리가 시를 읽는 이 순간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안진영 시인의 시원과 뗄 수 없는 제주, 바다의 상징을 품은 시편들 역시 개인과 역사,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순식간에 어떤 진실로 접속하는 놀라운 힘을 내포한다.
엄마, 저 구멍에서 빛이 들어와
손톱만 한 구멍으로 빛이 새어 들어와
-「초승달」 전문
4•3 당시 국군 토벌대를 피해 주민들이 숨어 지내던 ‘큰넓궤동굴’에서의 밤을 그린 시 「초승달」의 화자가 고발하는 죽음보다 깜깜한 빛의 역설과, “푸른 돌고래들이 지느러미를 터느라/ 폭풍처럼 요동을 치고 있어/ 저마다 한 사람씩 태우고/ 푸른 하늘로 솟구쳐 오를 거야”,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시 「잠시 안녕」의 이야기가 유족들,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내미는 손, 「인어공주 엄마」와 「인형이 폴짝」을 따라 흐르는, 아득하고 절대적인 사랑이 어룽지는 풍경은 안진영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고유한 무늬라 할 수 있다.
‘어제 걸었던 길’에게 안녕을
“어떤 때는 내가 바라고 바라던 선물을 보내기도 하고 또 어떤 땐 내가 바라지도 않는, 말도 안 되는 선물을 보내 나를 골탕 먹이기도 하는데 그럴 땐 할아버지가 주신 선물인 줄 모르고 냉큼 받은 때다. 사실 지금 내 이마에 든 빨간 멍도 할아버지가 보내 주신 건데 가끔 앞을 잘 못 보는 내게 눈을 하나 더 달아 주신 거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어쨌든 열일곱 살 내게 할아버지는 시를 선물로 보내 주셨는데 그 덕에 지금 나는 시의 길에서 헤매는 중이다.”
_시인의 말 중에서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은 곳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날 불러 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제 나,/ 내가 어떤 길을/ 걷고 싶어 하는지 알아 버렸어” “미안하지만 넌,/ 다른 동무를 찾아봐/ 난 나의 길을 갈게”, 동시집의 맨 마지막에서 “어제 걸었던 길”에게 보내는 안녕은 필연적으로 ‘낯설고 어색하고 솔직히 두렵지만 설레는’ 내일과 연결되어 있다. 자유롭고 힘 있는 존재로 거듭날 내일의 우리에게, 반가운 첫인사를 건네 보자.
화가 이석구는 두터운 물감으로 아이의 모습을 한 여리고 부드러운 존재들을 표현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독자의 상상을 새로운 차원으로 탄력 있게 옮겨 주는 장면들이 중간중간에 크게 숨을 트이게 한다. 밀도 높은 묘사와 다정한 시선이 시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서로 붙잡아 주고 엉덩이를 밀어 주며 완성한 세계, 『난 바위 낼게 넌 기운 내』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