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어떻게 이따위로 연설을 하고 다녔지?”
『아마겟돈을 회상하며』는 아들 마크 보니것의 서문으로 시작된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신문의 십자말풀이를 거침없이 풀어내는 탁월한 언어 감각의 소유자였지만 작가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던 아버지. 정신과 의사에게 우울증 진단을 받았지만 분명 우울증이 아닌 아버지. 그저 “내향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외향적인 사람 같았고, 외톨이가 되고 싶어하는 굉장히 사교적인 사람, 운이 없었기를 바라는 운좋은 사람 같은” 아버지. 지극히 모순적이면서 양극적인 성향의 괴짜 아버지 커트 보니것을 아들 마크 보니것은 진심으로 사랑했다.
물론 사람들은 아버지를 체제 전복적 인사라고 평했지만, 아들 마크가 보기에 아버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식으로 체제 전복적이지 않았다. 읽고 쓰는 행위가 곧 ‘생각’을 전복하는 시도이니, 아버지 커트 보니것은 분명 체제 전복적인 인사이긴 했다. 하지만 마크는 본인이 아는 사람들 중 가장 과격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였다고 술회한다. 마약도 하지 않고, 빠른 차도 몰지 않았으며 정의의 편에 서려 노력했던 사람이었고, 그저 글을 쓰는 과정에서—자기 자신과 독자들에게—일어나는 마법을 믿으며, 글이 잘 써질 때의 신나는 기분을 좀체 숨기지 못했던 작가였다고.
마크 보니것은 이런 아버지의 글 중 “언제 쓰였는지 대부분 표시되어 있지 않고 출판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들이며, 그 자체로 아주 훌륭”한 작품들을―편지, 연설문, 단편소설 등―모아 책으로 출간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의 보니것의 작품집 중 전쟁과 평화, 폭력과 휴머니즘에 대한 고찰이 그대로 담겨 그를 가장 직접적이고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이 탄생했다.
“하지만 저는 죽지 않았어요.”
일병 커트 보니것의 생존 신고 편지,
보니것 월드를 함축한 프리퀄이 되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세련되게 드러낸 아들 마크 보니것의 서문을 지나면, 일병 커트 보니것의 편지를 만날 수 있다. 독일군의 전쟁포로에서 풀려나 무사히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1945년, 스물셋 청년의 이 편지는 의미심장하다. 얼핏 단순한 생존 신고에 지나지 않는 듯한 이 글은 드레스덴 폭격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청년 보니것이 어떻게 관통했고, 어떤 위치에서 받아들였으며, 이후 그의 생애를 통해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하는 잠재의식을 내포해, 전쟁과 평화에 천착해 앞으로 펼쳐낼 그의 작품세계를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월 14일경에 미군이 나타났고 뒤이어 영국 공군도 찾아왔죠. 그들은 이십사 시간 동안 이십오만 명을 죽였고, 아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일 드레스덴을 통째로 파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죽지 않았어요.
그후 우리는 방공호에서 시신을 운반해오는 일에 투입되었어요. 뇌진탕, 화상, 질식으로 죽은 여자와 어린아이와 노인 들의 시신이었어요. 주민들은 시내의 거대한 화장터로 시신을 나르는 우리에게 욕을 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본문 23~24쪽
또한 커트 보니것은 이 글이 단순히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각 문단의 말미에 “하지만 저는 죽지 않았어요”라는 문장을 반복 배치하여 형식미를 부여했다. “뭐 그런거지”라는 문장을 반복하며 글 전체에 생동감과 리듬을 부여하는 그의 대표작 『제5도살장』을 고려한다면, 이 편지는 “구조와 리듬과 단어의 선택”에 주목하는 그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예고편이라 할 수 있겠다.
전쟁 이야기도 보니것이 하면 다르다.
지금껏 없었던 ‘전쟁과 평화’에 관한 가장 내밀하고 직접적인 보니것식 농담!
어떤 기억들은 한 개인을 정의하는 전부가 되기도 한다. 커트 보니것의 경우 익히 알려졌듯 드레스덴의 경험이 그의 문학 세계의 자양분이 되었는데, 그는 결코 ‘본격’ ‘전통’ 류의 전쟁 서사를 지향하지 않았다. 그의 전쟁 이야기는 어떤 전술을 어디에 썼고, 어느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승전국은 어디인가에 초점을 맞추거나 전쟁 이후 남겨진 피해자들의 상흔과 슬픔에 천착하는 내용이 아니다. 2차대전에 참전해 전투의 경험보다 ‘포로’로 잡힌 이후의 경험을 더 강렬히, 오래 겪었던 보니것은 엉뚱하고도 새로운 곳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적국의 피해 상황은 생략한 채 자국의 승전보만 드라이하게 전달하는 식으로 편집된 뉴스만 접하는 평범한 시민들이 참전 용사에게 쏟아내는 순박한 질문과 왜곡된 기대를 유머러스하게 터치하는가 하면(「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다」 ), 영원한 평화가 보장된 2037년, 세계군 타임스크린 중대가 타임머신 빔을 이용해 근대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최대치로 상충했던 1918년 전장의 한복판에 들어서는, 시간이 교차된 SF적 구성을 취하기도 한다(「멋진 날」).
전투가 소강 상태에 있을 때 포로들이 일구는 나름의 사회의 면면을 그려내기도 했다. 전시의 긴장이 누그러진 틈으로 인간 본성이 활개치는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한 것이다. 포로들은 다른 생각들은 마다하고 그저 집에 가서 먹고 싶은 음식을 상상하는 일에 열중하는가 하면(「버터보다 총」), 전리품들을 챙기는 데 급급하고 이를 이용해 암거래를 하며(「얼굴 펴」), 전쟁 이후의 삶을 위해 신분 세탁을 도모하기도 한다(「새미, 우리 둘이서만」).
이렇게 전쟁의 뒷면, 전쟁 이후를 다루는 보니것의 서사는 오히려 전쟁 자체를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가 된다.
오래 품어 통찰이 된 기억,
그리고 현재 진행형인 그의 메시지
전쟁을 다층적으로 변주하고, 그만큼 다양한 관점에서 관조한 보니것은 자신의 특기인 ‘우화’에도 전쟁 이야기를 대입해보는데, 시대와 사건이 정확하게 명시되지 않는 만큼 이러한 구성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삶을 억압하는 부조리에 맞서 그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자 마음먹고, 유니콘을 잡겠다는 아들의 허황된 희망을 지켜주고자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의 초상(「유니콘 덫」)은 낯설지 않다.
“아이비, 내가 지금 하려는 건, 그 말 휘장보다 더 중요한 거야.”
“그게 내 문제예요.” 아이비가 말했다. “난 그저 그 천보다 더 대단한 건 상상할 수가 없어요.”
“나도 그래.” 엘머가 말했다. “하지만 더 대단한 것들이 있어. 있어야만 하고.” 그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내일 허공에 매달려 춤을 출 때, 난 그걸 위해 춤추는 거야.” 본문 173쪽
냉전 이후 휴전 상태에 있지만, 여전히 세계 열강의 눈치를 보는 우리로서는 점령군이 바뀌면 존엄과 자유가 찾아오리라 기대하며 점령군 사령관의 책상을 만드는 베다의 목수 노인의 모습과, 반목과 증오로 삶이 마비된 이들의 건조한 일상이 우리와 닮았다고 느낄 것이다(「사령관의 책상」).
전시의 악몽 같은 세계에서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는 점령군의 심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러시아군은 나치와 달랐고, 미군은 그 둘과 또 굉장히 달랐다. 본문 248~249쪽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증오하게 되시겠죠.” 마르타가 말했다.
“네, 그리고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스스로에게 확신을 갖게 되겠죠.”
“확신이 아니라 무감각해지는 겁니다.” 내가 말했다.
“무감각.” 대위는 내 말을 되뇌었다. “누구든 무감각해질 만한 이유가 있는 거죠.”
“그게 최후의 방어선이에요. 무감각해지거나, 자살하거나.” 마르타가 말했다. 본문 254쪽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아마겟돈을 회상하며」는, 악마를 잡으려는 과학자들의 눈물겨운 사투라는 다소 황당하고 유머러스한 설정이 놓여 있는 맥락이긴 하지만 마치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세상은 마치 악의적인 마법에 걸린 것처럼 반으로 나뉘어 서로 적대하고 있었고, 한쪽이 이렇게 움직이면 상대는 저렇게 반응하는, 재앙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일련의 주고받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인류의 운명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것 같았죠. 하루하루 절망적인 무력함으로 가득했고, 늘 전날보다 더 나쁜 소식이 찾아왔습니다. 280쪽
“커트 보니것이 세상을 떠난 후, 우리는 인류의 상황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해설자를 잃었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커트 보니것의 포스가 가득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는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리뷰가 이 책을 적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이유다.
추천사
황홀하다.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하고,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대처하는, 작가로서 놀랍게 진화해온 보니것을 마주하는 작품! 살롱
보니것식 상상의 정맥이 전쟁이라는 소재와 맞물려 있는 글, 수수께끼 같은 일러스트에 더해 그의 자필 기록도 만나볼 수 있는 매력적인 책. 가디언
씁쓸하고 풍자적인 보니것 작품의 기저에 있는 어두운 모순들은 항상 개인을 옹호하고, 시스템에는 반대하기 위함이었다. 보스턴 글로브
보니것은 절망적인 생각들을 미친듯이 재밌게 풀어내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목소리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샌디에이고 유니언트리뷴
알려지지 않았던 보니것의 면면을 만나는 즐거움. 커커스 리뷰
작가의 천재성만큼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말하는 작품. 아마존닷컴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고 난 후의 생생한 증언들! 뉴욕타임스 북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