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단의 살아 있는 신화 르 클레지오, 그의 손에서 태어난 한 소녀의 눈부신 성장기
프랑스 현대 문단의 살아 있는 신화로 불리는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Poisson d’or』가 출간되었다. 프랑스 갈리마르사에서 1997년 출간되자마자 순수문학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장기간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를 지킨 작품으로, 예닐곱 살 때 유아 인신매매단에 납치돼 팔려간 한 소녀의 인생역정을 다루고 있다. 물화되고 기능화된 현대 도시문명의 공격적인 현실 앞에서 인간의 자리와 삶의 의미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를 수행하는 과정을 다룬 초기 작품들에서, 파나마 등지에서 인디언들과의 생활을 통과제의처럼 치르고 난 뒤 기계문명의 부정적인 그림자를 뒤로하고 인간의 본원적인 감성과 자연의 매혹이 영원한 침묵 속에 배어 있는 시원의 땅으로 찾아들어간, 필력(筆歷) 30년을 넘어선 작가 르 클레지오의 사상사적 변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왜 언젠가는 달아나지 않을 수 없는가”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 소설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밤‘이라는 뜻의 라일라라는 이름의 이 소녀에게 남은 어린 시절의 기억, 그러니까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밝혀주는 유일한 기억은 햇살이 내리쪼이는 눈부시게 하얀 거리, 비명처럼 고통스레 내지르는 까마귀 울음소리, 그리고 어린 그녀를 잡아 검은 자루 속에 집어넣는 커다란 손뿐이다. 그녀는 랄라 아스마라는 노파의 집으로 팔려가 그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지만, 그녀에게는 세상 전부인 그곳에서의 삶도 언제나 그녀의 여린 육체를 탐하는 노파의 아들이 있고 그녀를 학대하는 며느리가 있기에 그리 녹록치 않다. 노파가 죽고 나자 오갈 데 없어진 라일라는 우연히 알게 된 거리의 여자들이 살고 있는 수상한 여인숙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 아름다운 ‘공주님’들(라일라는 창녀들을 그렇게 부른다)과 살면서 세상에 눈떠간다. 숱한 역경과 고난을 거쳐 프랑스로 밀입국한 라일라의 삶에, 그때부터 자기를 찾기 위한 기나긴 항해가 시작된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언젠가는 달아나지 않을 수 없는가?”
표류가 끝나는 곳, 그곳에서 그녀는 황금의 물고기로 다시 태어났다
급류를 거슬러올라가는 물고기처럼 언제나 다른 사람, 다른 사물들 사이를 누비며 살아가고 싶어하는 그녀. 그러나 그녀는 발 딛는 곳 어디에서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방인임을 절감하며 끊임없이 표류한다. 프랑스를 전전하다 미국으로 그곳에서 다시 프랑스로, 그리고 아프리카로. 마침내 아프리카의 모래 먼지 자욱한 땅, 그녀의 조상이 수천 년 전부터 간단없는 삶을 살아왔던 그 땅에 발디딘 순간, 그녀는 본디 자기가 서 있어야 할 곳, 나고 자란 그곳에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제까지의 기나긴 표류가 결국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한 오랜 항해였음을 깨닫게 된다. 세상이라는 탁류에 휘말린 물고기이지만 그녀에게는 원래부터 황금 비늘이 달려 있었고, 아프리카 모래 사막 위에서 그녀는 드디어 그 황금 비늘을 번뜩이는 황금 물고기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녀의 기억은 그녀가 유괴되었던 15년 전을 뛰어넘어 영겁의 시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 말라붙은 소금처럼 새하얀 거리, 부동의 벽들, 까마귀 울음소리 가득한 사막에서 그녀는 자신의 흑진주처럼 까만 속살 아래 메아리치는 심장 박동 같은 북소리, 그녀 부족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유럽인들이 짐승 굴이나 진배없는 지하동굴 속에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을 무렵에 이미 문명화된 삶을 누렸던 이들이 부르는 시원(始原)의 노래, 우리 시대의 랭보 르 클레지오가 들려주는 것은 바로 이 생생한 태고의 노랫소리이다.
르 클레지오 J. M. G. Le Clegio는 1940년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남프랑스의 휴양도시 니스에서 태어났다. 니스에서 대학을 마친 그는 1963년 첫 작품 『조서』로 르노도 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훤칠한 키에 금발의 미남 청년인 그를 가리켜 매스컴은 ‘연인 역을 맡는 배우’처럼 생겼다고 떠들어댔고, 그는 단숨에 세인의 이목을 한몸에 받는 작가로 급부상했다. 지나치게 젊은 나이에 거둔 성공이 타고난 재능을 망치지는 않을까 하는 세간의 온갖 의구심과 우려에 대해 무관심하고 초연한 태도로 일관했던 르 클레지오는 『열병』과 『홍수』 『물질적 황홀』 등 화제작을 연달아 발표하며 자신의 재능이 천혜의 것임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 후 멕시코의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치면서 서구문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발견하게 되고 유럽인들이 지향하는 것과는 다른 존재의 모델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파리 문단에서의 사교 활동이나 대중적 접촉에는 전혀 관심 없는 “비밀스런” 작가, 프랑스에서 “그의 세대에서 가장 진정한 작가”로, 현역 작가 중 가장 대중적으로 읽히고 사랑받는 작가로 공히 인정받고 있는 르 클레지오. 그는 여전히 산과 바다 사이, 태양과 대지 사이에서 자발적 유배자로 살면서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