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과 마법소녀는 남에게 의존하는 캐릭터다
어릴 때부터 즐겨 보던 애니메이션 세상 속 여자 캐릭터는 자신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없다. 남자 캐릭터가 지구를 지키려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무장한 채로 전투에 나선다면, 여자 캐릭터는 마법도구로 마법을 부려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의 순간에는 왕자님이 나타나 구해준다. 이를테면 <세일러 문>의 세라는 변신 브로치를 이용해 변신을 하고, 마법무기를 들고 적에 맞선다. <세일러 문 R>에는 세라가 턱시도 가면의 키스를 받아 되살아난다는 결말이 나온다. 한편 애니메이션에서는 마법소녀가 마법의 힘을 이용해 성인 여자로 변신하거나 꿈꾸던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변신한다. <리리카 SOS>의 리리카는 간호사로, <큐티 하니>의 하니는 스튜어디스, 간호사, 아이돌, 신부 등으로 변신한다. 꿈꾸던 직업을 노력 없이 쟁취하는 모습인데다가 여자아이들이 원하는 직업도 한정적인 점이 한계다. 이처럼 오직 결혼을 인생 목표로 삼으며 남에게 의존하려는 수동적인 여성상을 대표하는 공주님과 마법소녀. 슬프게도 오랫동안 여자아이가 대중매체를 보며 감정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는 이런 유형이 대부분이었다.
직장의 꽃, 여성 전사와 여성 대원
애니메이션과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팀에서 여성 대원은 ‘여자’라는 역할이 부여되는데 사실상 조직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는 아닌 모습으로 그려진다. 여성 대원은 20세 전후의 섹시하고 젊은 여자로, 그에게 요구하는 조건은 아름다운 외모다. <독수리 오형제>의 홍일점인 백조 수나는 섹시한 여자를 맡고 있다. 그가 변신할 때는 누드 모습이 드러나고 팬티도 노출된다. <비밀전대 고레인저>에서 홍일점 대원의 분홍 제복과 헬멧 가운데에 새겨진 빨간 하트 마크는 여자임을 나타낸다. 또 여성 대원은 일터에서도 차 내오기, 식사 시중, 아이 돌보기 등 집안일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여성 캐릭터들은 남자와의 관계 안에서만 묘사되며, 여자끼리의 관계는 비중을 두지 않는다. <건담>에는 여성 승무원이 세 명이나 나오지만, 남자의 가족이나 지인 역할을 하는 캐릭터로만 그려진다. 세이라는 눈을 즐겁게 해주는 미소녀 역할, 프라우는 집안일이나 육아노동을 하는 역할, 미라이는 포용력을 발휘하는 어머니 같은 역할을 맡는다. 한편 <에반게리온>에서는 처음으로 아녀자가 주체가 된 팀이 등장하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 여자들이 이루는 팀은 남자들이 이루는 팀과 달리 엉망진창이 된다는 사례를 남기는 꼴이 돼버린 건 아닐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악의 여왕은 반드시 패배한다
능력 있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는 악역을 도맡는다. 주인공 목숨을 노리는 마녀와 계모는 발언권을 가진 간부급 캐릭터다. 그는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한 성숙한 여자로, 질투심 많고 물욕 강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그는 선한 역할을 맡은 여주인공과 대비되면서 ‘어린 여자의 적은 나이든 여자’라는 고정관념을 심어준다. 미아쟈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케 히메>에서 여자 캐릭터들이 이런 대립 구도를 잘 보여준다. <모노노케 히메>의 산은 미소녀인데, 에보시라는 립스틱을 짙게 바른 악의 제왕과 갈등한다. 이 둘 사이에 남자 아시타카가 끼어들어 중재 역할을 하는데, <모노노케 히메>는 여자끼리는 대화가 통하지 않고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한다 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 왕국 여주인공들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깨닫지 못하고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며, 남자 전사에게 교태를 부리거나 혹은 남자 전사처럼 싸울 줄만 아는데, 이들을 과연 TV 앞 여자아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존재라 할 수 있을까.
과연 애니메이션 왕국은 이제껏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취급을 받고 분에 못 이겨 눈물짓는 소녀를 적극적으로 그려왔던가? 조직의 차별 대우에 저항하는 여성 대원은 또 어떠한가? 상사, 동료, 시청자의 성희롱에 단호한 태도를 보여준 붉은 전사는 존재했던가? (…) 애니메이션 왕국은 소녀가 세상을 구원해줄 것은 기대하면서 소녀를 구하는 일에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_255쪽
여성 위인은 일만 잘해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위인전에서 여성 위인은 남초사회에서 성공한 유일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남자 못지않은 능력을 갖추고 남성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업적을 이뤄낸 사람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대표적으로 과학자로서 노벨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퀴리 부인을 꼽을 수 있다. 여성 위인은 능력도 중요하지만, 인생에서 사랑과 결혼도 빼놓을 수 없다. 퀴리 부인 위인전에서는 마리 퀴리의 남편 피에르 퀴리가 삶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피에르와의 만남과 이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와 마리가 가정에서 좋은 아내이자 현명한 어머니 역할을 해내려 노력했다는 이야기가 중시된다.
여성스러움을 지겹도록 강요받는 자애로운 어머니
여성 위인은 여성에게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활동 분야에서만 인정받기도 한다. 대표적 인물로 간호사 나이팅게일이 있다. 나이팅게일을 수식하는 말에는 ‘백의의 천사’ ‘램프를 든 여인’이 있는데, 과연 나이팅게일의 삶 전반을 설명하는 적절한 말들이라 할 수 있을까? 위인전에서는 그가 스쿠타리 야전병원에서 간호사로 활동하던 자애로운 인물로 묘사되기만 할 뿐, 다른 영역에서 활약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나이팅게일은 통계학에 대한 열정이 넘치고 숫자에 상당히 밝았다 한다. 그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대량의 통계표와 보고서를 작성하고, 영국 육군병원의 높은 사망률에 항의하여 육군당국에 위생 개혁을 촉구했다. 나이팅게일은 모성이나 여성성을 상징하는 인물로만 인식되는데, 실은 정보 수집 능력과 면밀한 조사 및 해석 능력을 갖춘 사람이기도 했다.
여성 위인전은 위인의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주로 다루어 착한 모범생 소녀 이미지를 고착화하고 중요한 업적을 이룬 어른이나 중년이 된 이후의 이야기는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헬렌 켈러 위인전에는 예의범절을 모르던 소녀가 언어를 익혀 모범생이 되는 이야기가 길게 묘사되는 반면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한 일화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실제로 헬렌 켈러는 사회비평가로 자서전에 비장애인 중심적 문화를 비판한 내용을 썼다. 또 그는 연설하기를 좋아해 딱딱한 강연회뿐 아니라 쇼 무대에 서고, 본인의 일대기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는 스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평생 독신으로 지낸 여성 위인은 결혼이라는 여자의 인생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모두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붙는다. 나이팅게일은 병사의 어머니, 헬렌 켈러는 장애인의 어머니로 위인전에서 모두 성모로 변모한다. 그러나 모범생, 천사, 어머니, 성녀 이미지를 지닌 여성 위인들은 각자 전문 분야에서 다방면으로 활약했다. 그런 이야기는 위인전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으며 정형화된 여성의 삶만 그려져왔다. 시대는 달라졌다. 이제 대중매체 속 서사에서 여성은 홍일점이 아닌 개별의 존재로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개성 넘치는 주인공이 존재하는 세계에 한걸음 더 가까워질 것이다.
과거를 살아오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여성 혐오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려면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인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기본권을 촉구하는 운동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공주님을 꿈꾸던 여자아이는 대상화와 선망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마법소녀를 꿈꾸던 여자아이는 주체적 힘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지만 그 어떤 대작 드라마보다 장대한 서막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서의 권리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자격은 모두 평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마땅한 일이지만 마땅히 실행돼오지 못한 일이다. 고루한 관념을 철폐하는 방법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열린 세상을 전해야 할 매체가 그들의 정당한 길잡이가 되어줄 수만 있다면 말이다. _옮긴이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