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의 책소개
잠 속에서 어둠의 뿌리가 피 흘리고 있을 때 생채기마다 소금의 모래알 뒹구는 민달팽이다 파도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목소리만 남은 빈 바다에 갇혀서 비틀거리는 은빛 흔적이다. _「말 2」 부분
―여러분은 법칙과 모든 법칙적인 죽음을 믿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꽃의 생장을 믿습니다. _「수업」 부분
밝고 깨끗한 아파트의 빈방들이
빈 눈으로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다. _「우는 아이를 위하여」 부분
1973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한 김옥영 시인의 첫 시집 『어둠에 갇힌 불빛은 뜨겁다』를 문학동네포에지 11번으로 새롭게 복간한다. 1979년 겨울 문장사에서 첫 시집을 묶었으니 그로부터 꼬박 42년 만이다. 총 47편의 시를 5부에 나누어 실었다. 시란 “모든 요지부동에 대한 음험하고 고독한 복수의 작업”이라던 시인은 1982년 KBS <문학기행>을 시작으로 30여 년간 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하며 회의하고 질문하며 공고한 현실의 균열로부터 ‘다른’ 어떤 것을 보여주려 노력해왔다. 문장사 초판 해설에서 김주연 평론가는 김옥영 시인이 다루는 언어에 대한 고민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무거운 삶의 현장과 부딪쳐서 울려나오는 어쩔 수 없는 결과의 경이”임을 인정하며 허무 속에서 이어지는 언어와의 싸움이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축복이라고 말한다. 김옥영 시인은 이 시집 한 권으로 “‘여성시’라는 물줄기의 한 수원지를 형성”(김정란)한 것이다.
“타인에게 가장 잘 이르는 길은 자기 자신을 더 열심히 들여다보는 일이라고”(시인의 말) 믿는 김옥영의 시를 읽는 일은 ‘사랑’ ‘슬픔’이라는 말의 과질(果質)에서 “지상에 일어서는 빈집 하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김옥영은 말(言)의 확고하지 않음에서 허망하지만 “가장 견고한 아픔”을 본다(「말 1」). 허물어지고 부서지는 지상의 집이 아닌 땅속 그늘의 주춧돌을, 날아갈 수 없는 종이새에서 불새의 모습을 한 별을, 베어져버린 가지에서 그늘의 깊은 꿈과 꽃들을 데리고 아득히 날아오르는 뿌리의 푸른 마술을. 그는 언제나 행복하게 끝나 이제 아무도 울지 않는 동화의 나라에서 홀로 울고 있는 아이의 울음 앞으로 우리를 데려간다(「우는 아이를 위하여」). “낮 속의 밤 밤 속의 그 밤”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넘겨볼 수 없는 어둠”(「말 2」) 속에서 그 울음은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는 우리”의 집에 “가로질린 쇠빗장을 조금씩 조금씩 흔들”어댄다(「도둑괭이를 위하여」). “길들여진 아이들은 조심조심 허락된 제 몫의 솜사탕을 핥고 있”는(「수업」) 백열하는 “오후 두시의 명백한 태양”이 지배하는 확실한 세계에서 문득 감각하게 되는 “축축한 지하”. “화석, 지푸라기, 눈물, 뼈, 죽은 개, 현실, 지렁이들”이 의좋게(「맨 처음 놓이는 돌은 땅속에 있다」) 꿈꾸고 있는 기름진 어둠 속 뿌리의 세계로.
네가 ‘사랑’이라고 혹은 ‘슬픔’이라고 말할 때
상아의 이빨이 가지런한 네 말
네 말이 씹는 과질(果質) 속으로
몇 마리 마른 고기가 텀벙 뛰어들기도 하지만,
네가 ‘사랑’이라고 혹은 ‘슬픔’이라고 말할 때
지상에 일어서는 것은
빈집 하나다
단단한 골격을 두른 말의 어깨 너머
말이 부려놓는 공간,
우기(雨期)의 긴 골목으로
깊이 발이 빠지면
목소리들은 안개에 머리를 부딪고
스스로 체중을 벗어
들의 공복(空腹)에 살을 섞는다.
들의 그림자 들의 뿌리께 물을 주며
오 허깨비들이
이 들을 키운다.
허깨비를 본 자는
허깨비의 나라로밖에 갈 수 없어
네가 ‘사랑’이라고 혹은 ‘슬픔’이라고 말할 때
가시 엉겅퀴들은 흔들리지만
살아 있는 은빛 독사는 보이지 않고
흰 공터만 눈을 뜬다.
유리창마다 자옥이 성에 끼는 겨울날
(때로 성에를 꿰뚫는 날카로운 햇빛의 파편)
벌목된 주검 몇 구 뛰어넘어
울렸다 사라지는 쪽으로
왜 고개가 돌려지지 않을까?
서쪽 하늘에 서성이며 떠나는 공기의 맨발이
오래도록 가슴을 밟고 밟을 뿐.
네가 ‘사랑’이라는 혹은 ‘슬픔’이라는
빈집을 세울 때.
_「말 1」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