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장소를 사랑한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고, 느낀 모든 것은 분명 ‘어딘가’에서 일어났다/일어난다/일어날 것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난 곳, 그곳에 흐르던 음악, 그날의 고요 혹은 소란, 바람의 질감, 눈부신 햇살 혹은 낮게 깔린 구름, 밀폐된 곳이건 광활한 곳이건, 쓸쓸했든 두근거렸든 슬펐든 이제 그만 잊고 싶든 미지의 어떤 날이 기대되든, 그때의 기억, 막연한 예감, 우리가 나눈 이야기, 미묘한 분위기, 피부로 전해오던 촉감. 우린 가상의 존재가 아니니까 언제나 3차원 공간에서 숨쉬고 있는데 일상의 장소도 마치 공기처럼, 굳이 인식하거나 되돌아보지 않으면 그 사실을 종종 잊는다. 그러나 그 일상은 결국 우리 인생이 된다.
어떤 재앙은 혁명을 가져온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전쟁과 전염병이 그렇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우리가 있는 곳을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자발적 웅크림을 요구한 질병은 그걸 확인시켜줬다. 움직이고 싶다, 나가고 싶다, 내가 기억하는 어떤 곳에 내 몸을 가져다놓고 싶다, 이곳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가고 싶다, 다시. 간절히. 비대면 온라인 세계에서 가능한 일도 있었지만 그것이 장소를 탐험하고 장소에 머물고 싶은 우리의 동물적 본능까지 충족시켜주진 못했다.
이런 시점에 출간된 『모든 장소의 기억』은 그래서 더 애틋하고 뜻깊다. 지독한 ‘장소 애호가’인 저자가, 우리가 머물고 일하며 지나치고 추억하는 장소 서른여섯 곳에 대해 쓴 에세이를 모았다. 지금 여기, ‘내가 있는 곳’을 새롭게 발견하게 해줄 아름다운 산문집. 이 책을 통해 마음속 소중한 장소를 기억하고, 앞으로 만들어갈 기억의 배경이 되어줄 새로운 장소를 상상해볼 수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곳을 꿈꿔볼 수도 있다. 저자 박성진은 전 <공간space> 편집장이며, 건축을 전공했다. 지금은 공간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어린이집, 부동산, 자동차:
지극히 개인적이기에 가장 다채로운 기록
그는 지극히 사적이고 일상적인 장소를 말한다. 행복은 장소에 산다. 어떤 곳은 떠올리기만 해도 따뜻해지니까. 2009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2026년까지 세 아이의 아빠로 네버엔딩 어린이집 순례중인 그에겐 어린이집 현관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주는 장소다. 부동산에 대한 생각도 재미있다. 부동산은 그에게 오히려 옛날 ‘복덕방’에 가까운 곳. “돈을 좇아 부동산을 찾아다니면 수시로 괴로움과 절망을 느낄지 몰라도 꿈과 내 삶을 좇아 부동산에 가면 행복과 즐거움을
느낀다.” 하긴, 내가 살 곳, 거기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날을 상상하며 부동산에 죽치고 앉아 있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곳에서 마시는 달콤한 믹스커피의 맛을. 정해진 답처럼 모두가 원하는 아파트를 욕망하는 게 현실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천문학적 액수의 공간에서 어떤 삶을 어떻게 행복하게 누릴지 생각해보는 일이 드문 건 기이한 현상 아닐까?
사적이기에 그가 있는 곳은 한없이 달콤한 감각을 선사하기도 한다. 자동차는 참 특이한 공간이다. 세상과 나 사이가 차창이라는 유리막 하나로 분리되어 있기에 오히려 가장 가까이 연결된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비오는 날이면 더 그렇다.
비 내리는 거리의 풍경과 정서는 오히려 차 안에서 더 오롯해진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비에 젖지 않고 비에 빠져든다는 분리와 일체의 이중적 경험구조 때문일 것이다.(21쪽)
미술관, 로비, 사무실:
도발적인 시각과 제안들
어떤 제안들은 꽤 도발적이고, 어떤 곳에선 건축 전공자다운 예리한 시선이 빛난다. 우리가 습관처럼 받아들이던 공간의 룰에 “왜 꼭 그래야 하냐”고 반기를 든다. 그에게 미술관은 무엇보다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그걸 꼭 다 보거나 이해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볕 따가운 날에도 긴 장마철에도 추운 겨울에도 천천히 생각하며 여유롭게 걸을 곳이 있다는 것. 그렇게 산책하는 마음으로 가야 작품 앞에서도 마음이 열린다.
로비에 대해서라면 불만이 많다. 비록 사기업 건물이라도 대로변에 위치해 어느 정도 공적 기능을 담당하는 로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낯선 이를 환대해주는 듯한 분위기. 그래서 로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의외로 사람이라 한다. 아무리 근사한 로비여도 검은색 정장을 위아래로 갖춰 입은 보안요원들이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며 왜 왔냐고 추궁하면 좋은 로비가 아니다.
언제부턴가 공간 리모델링의 만병통치약처럼 통하는 ‘공유’에도 그는 마냥 호의적이지 않다. 사람은 때때로 연결되고 때때로 혼자여야 하는 존재다. 사무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무실은 조직화되고 집단화된 사회에서 우리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치열한 삶의 터전이다. 물론 여기에는 개인의 삶보다 더 중요한 집단적 가치가 작동하지만 그래도 험한 돌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작은 꽃과 식물이 자라는 것처럼 그들의 개인적 삶이 이곳에 묻지 않을 수 없다. 공유 사무실 혹은 자율좌석제는 일단 이 흔적들을 지우고 부정한다. 내가 보수적인 것일까? 공유가 중요하고 흥미롭지만 그래도 내 모든 것을 꺼내 공유하고 싶진 않다. 사무실에서도 남루하고 어수룩한 나의 흔적들이 머물 공간이 필요하다.(40쪽)
병원, 지하철, 버스 정류장:
아프고 무섭지 않게, 따뜻한 빛
그는 예민하고 무심할 수가 없다. 그 섬세한 감수성이 도움이 됐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그곳엔 창이 없었다. 아버지를 둘러싼 건 차가운 기계들뿐. 아버지가 그곳에서 섬망에 시달리는 와중에 그는 의사의 말을 듣는다.
그런데 의사 말이 섬망은 계속 중환자실에 있으면 호전되지 않고 일반 병동으로 올라가야 빨리 회복된다고 했다. 왜 그럴까 하는 의심이 들어 의사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열린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 있어야 다시 돌아와요. 이렇게 밀폐된 곳에서 혼자 지내면 더 악화되고 어려워져요.”
결국 약물 때문에 생긴 증상이지만 공간과 사람이 마음의 병을 몰아낸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찾을 때마다 건강한 사람도 이렇게 갇힌 공간에서 침대에 양손이 묶여 있다면 몸과 마음에 병이 스며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조그만 창문은 이곳에서 경치를 감상하고 여유를 누리게 해줄 사치의 수단이 아니라, 시들어가는 생명을 일으켜세우고, 어쩌면 그들을 위해 세상의 마지막 찬가를 들려줄 통로인 것이다.(15~16쪽)
도시는 외롭다. 이제 지하철에서는 모두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을 뿐, 저자처럼 타인의 삶을 궁금해하며 낯선 이를 바라보는 이는 거의 없다. 저자는 버스 정류장도 그립다. 그가 생각하는 버스 정류장은 중앙차로에 번듯한 셸터가 있는 그 버스 정류장이 아니다. 물론 지금의 버스 정류장은 편리하고 그런 대세에 저항하긴 어렵겠지만 그가 기억하는 버스 정류장은 노선표 붙인 푯대만 덩그라니 서 있고 노을 지는 저녁 기약 없이 퇴근하는 아빠를 기다리던 그 버스 정류장이다. 무작정 누군가를 기다리며 설렘과 쓸쓸함을 느껴본 기억은 언제쯤이 마지막일까?
그러나 마냥 회고적인 건 아니다. 지나간 기억을 불러 세우고 건강하지 않은 지금의 공간을 돌아보는 동안 자연스레 아직 오지 않은 장소를 구체적으로 꿈꿔보게 된다. 다가올 미래에, 우린 어디에 있으면 좀더 행복할 수 있을까?
오늘 나는 또 어떤 공간과 장소를 배회하며 누군가를 만나고, 떠들고, 쉬고, 놀고, 먹고, 사고, 통화하고, 쓰고, 일하고, 생각할 것인가? 별다른 의식 없이 습관처럼 지나온 매일매일의 다채로운 장소가 나의 일상을 꿰어간다. 이 사소한 공간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경험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우리 생활의 절반은 그냥 지나가고 사라질 것이다. 언 차창의 서리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소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일상이 차곡차곡 쌓여 인생이 되기에.(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