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제발트가 그의 ‘귀한 작가’들에게 바치는 슬프고 아름다운 헌사
독일문학의 거장 W. G. 제발트의 에세이 『전원에 머문 날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책은 그간 이어져온 ‘인문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에 포함된 제발트 선집 중 『공중전과 문학』『자연을 따라. 기초시』『캄포 산토』에 이은 네번째 권이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소설 『현기증. 감정들』까지 포함하면 총 다섯번째 책이다.
그간 제발트는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며 한국에서도 ‘제발디언’이라 불리는 열혈독자들을 무수히 양산해왔다. “오늘날에도 위대한 문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작가”라는 수전 손택의 찬사와 함께 미국과 영국에서 먼저 주목받은 그는,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이어가던 중 2001년 12월 14일 영국 노리치 인근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뉴욕 타임스 북리뷰는 이 년 뒤 출간된 그의 유고집 『캄포 산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제발트의 이름을 카프카, 보르헤스, 프루스트와 나란한 위치에 두었다. 이제 엄연한 고전의 반열에 오르고 있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이 책은 꽤 독특하다 할 만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인 비평에세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제발트 특유의 글쓰기가 잘 드러난 하나의 또하나의 작품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글쓰기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작가들에 대해
흠모와 연민을 담아 조명한 제발트의 비평적 산문
『전원에 머문 날들』은 요한 페터 헤벨, 고트프리트 켈러, 로베르트 발저, 장자크 루소, 에두아르트 뫼리케, 얀 페터 트리프, 총 여섯 작가에 대해 다룬다. 제발트의 다른 비평집인 『불행에 관한 기술』『섬뜩한 고향』이 특정 주제 아래 다양한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들에 대한 밀도 높은 비평적 탐구를 시도했다면, 이 책에서는 그 관심을 스위스와 독일 서남부 알레만 지역 출신 작가들에게 쏟는다. 그리고 이들은 제발트가 생전에 가장 귀하게 생각했던 작가들이다.
이 책은 제발트의 문학연구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는 소설을 쓰면서도 꾸준히 비평작업을 지속해왔는데, 늘 곁에 두고 읽어왔던 요한 페터 헤벨, 고트프리트 켈러, 로베르트 발저에 한결같은 애정을 표하며 “어쩌면 너무 늦어지기 전에” 이들에 대해 경의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에 담긴 원고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계기로 쓰게 된 장자크 루소와 에두아르트 뫼리케에 대한 글들이 더해지자, 이 원고들이 서로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맨 마지막에 화가 얀 페터 트리프에 대한 에세이가 실린 것도 그 나름의 질서에 따른 결과다. 다른 작가들과 달리 화가에 대한 글이 실린 것은 단순히 그가 얀 페터 트리프와 친구 사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발트는 “아주 깊숙이 들여다봐야 한다는 점, 예술은 수공예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 사물들을 하나씩 헤아리는 일에는 감수해야 할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을 알려준 것이 바로 트리프의 작품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트리프 역시 켈러와 발저의 작품을 귀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작가들은 모두 시대와 불화하고 우울로 고통받았으나 글쓰기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이들이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본국에서나 세계문학사에서 중심이 아닌 변방에 위치해 있다. 제발트가 부러 모아놓은 그 이름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비껴나 있고 그늘진 인상을 풍긴다. 그도 그럴 것이 켈러와 발저, 헤벨은 독일문학사에서는 변방에 해당할 스위스 태생이고, 루소 역시 스위스 제네바 출신이다. 헤벨과 뫼리케는 알레만 지역, 즉 스위스 및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독일 서남부 지역에서 평생을 살았기에 특정한 지역색이 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들이 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 책의 지향성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사실 제발트 덕분에 이러한 평가조차 달라지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전원에 머문 날들』의 특별한 점이 생겨난다. ‘전원’은 소란스러운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픈 소망, 급변하는 세상의 속도에서 벗어나 느림과 정체 속에 머무르고자 하는 소망의 시공간이다. 책에 등장하는 작가들은 각각의 이유로 전원을 삶의 토대로 삼고자 했다. 그들에게 전원은 정신적 고통을 피할 안식처였다. 물론 그러한 도피처를 찾는 인간의 실존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전원은 본질적으로 우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황폐해진 심신을 달래기 위해 찾는 세계가 전원인 것이다. 그리고 이 우울은 제발트가 거듭 강조하듯이 글쓰기라는 악덕을 필연적으로 끌어들이는 불치의 병과 같은 것이다.
“언제나 내게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문인들의 끔찍스러운 끈기다.
글쓰기라는 악덕은 너무나 고약해서 어떤 약도 듣지 않는다.”
제발트는 「머리말」에서 이 책이 자신이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는 “동료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난외주석”이라고 말한다. 이 책이 비평적 성격의 글이라는 것을 스스로 분명히 밝힌 셈이다. 그러나 막상 책장을 펼쳐 읽다보면, 독자들은 전혀 다른 인상을 받게 된다. 학술적인 글쓰기에서는 허용되지 않을 다소 주관적이고 때로는 지극히 개인적인 목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번역자인 이경진 교수에 의하면, 제발트는 이 책에서 다루는 작가들을 향한 흠모와 연민의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그들과 관련된 자신의 개인사를 끄집어내고 그들과의 사적 인연을 어떻게든 에세이의 중요한 주제로 격상시키려 한다. 이 같은 서술 태도는 제발트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을 다루면서 결국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당연한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이미 에세이적인 소설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러한 이야기 방식이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전원에 머문 날들』은 이미 한 권의 시집과 세 권의 소설에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로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개척한 작가의 또다른 실험적 ‘작품’으로 읽어볼 수 있다. 이 책은 앞서 발간한 두 비평서와 달리 학술적 글쓰기의 징표인 주석을 깨끗이 추방해버렸으며, 특정 작가의 문학세계를 체계적으로 해설하려는 노력에는 통 관심이 없다는 듯이 작가와 관련된 온갖 여담과 사담으로 즐겨 빠져든다. 그리고 제발트의 소설작품들이 그렇듯 다수의 이미지가 텍스트 사이에서 존재감을 발하고 있다.
마지막에 실린 얀 페터 트리프에 대한 에세이는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제발트는 이 책이 화가가 초상화를 그리듯이, 일종의 ‘작가초상’으로서 쓰였다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트리프의 작업방식과 이에 대한 제발트의 비평은 이 책을 쓰는 방식에 대한 메타적 설명이자 논평으로 읽힌다. 이런 점에서 『전원에 머문 날들』은 제발트의 중요한 시학서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제발트는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긴 작가들을 소환하여 스스로 글쓰기라는 작업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로베르트 발저가 그러했듯 “문학을 완전히 등졌음에도” 여전히 조끼 호주머니 속에 몽당연필과 메모지를 넣어가지고 다니며 이런저런 것들을 자주 적어넣는, 그러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느끼면 마치 “나쁜 짓이나 심지어 부끄러운 짓”을 하려다 들킨 사람처럼 메모장을 감추는,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환희에 찬 고고한 삶들에 관한 기록이 여기에 있다.
*
언제나 내게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문인들의 끔찍스러운 끈기다. 글쓰기라는 악덕은 너무나 고약해서 어떤 약도 듣지 않는다. 이 악덕에 빠진 자들은 글쓰기의 즐거움이 사라진 지 오래여도, 심지어 켈러가 말했듯 나날이 바보천치로 떨어질 위험이 있는 중년의 위기가 찾아와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멈추고 싶다는 생각만큼 절박한 바람이 없는 때에도 그 악덕을 계속해서 실천한다.(8쪽)
우주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고찰들은 분명 독자에게 조금이라도 저 우주 바깥으로 산보를 시켜주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면 독자는 우주를 친숙하게 여기게 될 터이고, 저기 낯선 도시를 밝히고 있는 조명들처럼 밤새 빛나고 있는 가장 머나먼 별들에서도 사람들은 우리처럼 자기 방에 앉아 “신문이나 저녁기도문을 읽거나, 실을 잣고 뜨개질을 하며, 트럼프 게임을 할 것이고 사내아이는 비례법을 계산하는 연습문제를 풀 것”이라는 상상을 해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21쪽)
당일치기 여행객들도 다 집으로 돌아가버리는 저녁 무렵이면 섬은 우리 문명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서는 더이상 경험할 수 없는 고요 속으로 잠겨갔다. 이따금씩 호수를 스치며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커다란 포플러나무 잎사귀들이 사부작거릴 뿐, 미동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57쪽)
그는 여전히 예전처럼 소설과 잡문을 쓰느라 스스로를 괴롭혀야 했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작업은 더이상 진척될 줄 몰랐다. 화가 프리드리히 페히트는 이 시절에 뫼리케의 다음과 같은 행동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이야기한다. 뫼리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그것들을 일일이 특별한 노트나 메모지에 적곤 했다. 하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 초고들을 “갈기갈기 찢어서 자기 파자마 호주머니 속 깊숙이 떨구었다”.(108쪽)
글쓰기라는 기술은 실제로 어지간해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격의 유지를 위해서, 손쓸 새 없이 거세지는 시커먼 소란을 몰아내려는 시도이다. 오랜 시간 켈러는 이를 위해 힘겨운 노력을 기울여왔다. 물론 그는 이런 노력이 결국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임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145쪽)
이 산책자 사진, 그러니까 발저가 입은 스리피스 정장의 옷감과 보드라운 와이셔츠 깃, 넥타이 매듭, 노화로 생긴 손등의 반점, 짧게 깎은 희끗희끗한 콧수염, 그리고 고요한 눈빛을 볼 때면 내 조부를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조부는 발저와 단순히 외관뿐만 아니라, 모자를 겨드랑이에 끼고 다닌다든가 화창한 여름날에도 우산이나 우비를 챙겨 다닌다든가 하는 습관까지 닮아 있었다.(155쪽)
중요한 것은 맹렬한 노동의 동물인 우리와 종속적이고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물들의 자율적인 현존이다. 그런데 그 사물들은 (보통은)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으므로, 우리가 그것들에 관해 아는 바보다 그것들이 우리에 관해 아는 바가 더 많다. 그 사물들은 우리와 함께한 경험을 지니고 다니며—사실상—우리 자신의 역사가 쓰인 우리 앞에 펼쳐진 책 그 자체이다.(198쪽)
*
고백하건대, 제발트가 아니었다면 소설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책들은 항상 손이 닿는 거리에 있었고 글이 막히거나 생각이 갈피를 잡지 못할 때, 글쓰기에 대한 회의, 문학과 작가에 대한 환멸, 예술이나 철학, 심지어 인간과 그들이 기록한 역사가 무슨 소용인가라는 원망에 사로잡힐 때마다 피난처가 되었다. 세계의 어리석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게 뒤엉킨 인간과 자연, 사회의 무게에 맞서 생각하고 행위할 수 있게 다시 일으켜주는 장소. 그러므로 나는 매일 그의 글을 읽고 필사했다. 그것만이 이 “글쓰기라는 악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다시 말해 글을 쓰는 것만이 글쓰기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므로._정지돈
제발트의 산문은 서술의 특징과 미학적인 장치가 매우 오묘하여 독자를 끝없이 파생되는 미로로 이끈다. 그의 글을 읽을 때 독자들은 ‘제발트를 읽는다’는 그 아득한 느낌에서 단 한 순간도 놓여날 수가 없다._배수아
생의 불가해를 그 불가해함에 대한 사랑으로 읽어내는 것. 적어도 나는 제발트를 읽는 것에 대한 환희를 그 이상의 말로는 지시할 수 없을 것 같다._김금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