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마음속에 묻어둔 그리움의 절창, 사랑시의 백미(白眉)
등단 31년째를 맞이하는 강인한 시인의 ‘사랑시선집’ 『어린 신에게』가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그간 시인이 펴낸 다섯 권의 시집에서 ‘사랑시’들만 골라 엮은 것이다.
시인이 ‘사랑시’라는 이름으로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운명적인 사랑”이다. 흔히 우리 주변에서 쉽게 드러내고 값싸게 떠도는 천박한 사랑이 아닌, “삼십 년 묵은 비밀을 송두리째 고백한 셈이 되었다. 벌거숭이로 선 듯한 기분”이라는 시인 스스로의 말처럼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시인의 마음에 간절하게 묻어둔 애뜻한 사랑의 말이 이 시집의 곳곳에 스며 있다. 어떤 불행을 겪더라도 끝끝내 감추고자 하는 절망적 용기와, 드러낼 수밖에 없는 간절한 그리움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이다.
알 수는 없으나, 시인을 눈멀게 하고 내출혈을 일으키게 하는, 가슴속에 꽁꽁 내장되어 있는 그의 사랑은 시에서 “율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율리”는 시인이 결혼 전 플로토닉한 사랑을 나눈 연인이다. 한 주일에 두 편씩 엽서를 써서 백 통을 채우고서야 끝난 그녀와의 사랑은 한때 시인으로 하여금 시의 붓을 꺾게 했다. “율리”는 ‘눈먼 사내’와 ‘불꽃’ 연작시, 그리고 「램프의 시」에 일관되어 시집의 마지막에 이르도록 시인의 외로움과 열정과 고통과 그리움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결별의 이유를 끝내 드러내지 않는 시인의 사랑은 목숨을 거는 절절한 사랑이지만 집착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랑이다. 그와 같은 사랑은 또 하나의 “율리”인 딸에 대한 사랑과 아내에 대한 사랑에서도 순정하게 드러난다. 「귓밥 파기」는 그 중 빼어난 절창이다.
신석정과 김수영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평가되는 강인한의 시는 가슴속의 따뜻한 열정과 삶의 외로움을 특유의 감수성으로 길어올리면서 보기 드문 사랑시의 걸작을 양산하고 있다. 강인한 시의 백미(白眉)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이 사랑시선집은 사랑의 시편들이야말로 그의 시세계의 원천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사랑은 가슴속에 오래오래 달구어진 뜨거운 화염이며, 황폐한 시대를 온전하게 견뎌내게 하는 힘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