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 체계로의 여행―최승자의 시세계가 도달한 궁극의 지점
6년 만에 내놓은 최승자의 다섯번째 시집 『연인들』은 시인이 최근 몇 년간 신비 체계와 그 안에 깃들인 메시지를 부단히 탐구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녀의 시 하나하나엔 신비주의에 대한 사유와 탐험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최승자 시인의 시력(詩歷)에 있어, 시와 맞붙기로 한 이후 오랫동안 진행된 자기 자신과의 결곡한 싸움이 마침내 도달한 완성의 지점처럼 보인다.
전시집 『내 무덤, 푸르고』를 출간한 지 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세월을 시인은 “나 자신, 나 자신을 둘러싼 상황, 세계에 너무 지쳤다고 이제 뭔가 다른 게 필요하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끼고서 한 여행을 시작하여 그 여행을 마치고서 이제 비로소 한 입구, 다른 한 출발점에 서 있는 듯”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즉 이번 시집은 시인이 자기 자신을, 자신의 시를 찾아가는 여행의 목적지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이 최승자의 시력에서 획기적인 전기에 해당한다는 점은 너무도 당연하다.
「유라누스를 위하여」를 비롯한 일련의 시들은, 음양 오행론, 서양 점성술,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 타로 카드 등 동서양의 상징 체계에 그 뿌리가 놓여 있다. 특히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들을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 「연인들」 연작은 그 절정을 이룬다. 이 시들을 지배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인식이다. 여기서 시간 인식이란 죽음의 인식이다. 또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할 것 없이, 지상 위의 사람들 모두에게 존재하는 페미닌적 요소”의 인식이다.
최승자 시인은 40편의 시에서 왜 이토록 신비주의와 상징 체계에 깊이 빠져든 것일까? 불혹(不惑)을 훨씬 넘긴 나이에 시인은 혼돈으로 가득 찬 지상의 삶에 천상의 비밀을 옮겨놓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육박해오는 시간의 공포로부터 자유를 찾다 보니 신비 체계의 길이 앞에 있었던 것일까. 김정환 시인이 “이토록 신비스러운 세계가 이토록 흥건하게 창조주의 눈물에 젖어 있는 예를 나는 한국시사에서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라고 경탄한 이유를 시집 『연인들』의 신비로운 언어 속에서 찾아보는 것은 읽는 이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