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금술과 연금술의 정신세계를 통해 본 인간 존재의 신화적 밑그림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종교사가인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초기 대표 저작인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Forgerons et Alchimistes』가 이재실 교수(부산외국어대학교 불어과)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1956년 프랑스 플라마리옹(Flammarion)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되었으며, 1977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1977년 개정판을 번역 텍스트로 삼았다.
엘리아데의 학문적 출발점은, 현대인이 과학의 무한한 진보를 맹종한 탓에 잃어버리게 된 주술적 종교적 정신세계를 재발견하고, 문화의 기저에 깔려 있는 이미지와 원형(原形), 상징 들을 복원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데 있다. 그는 전통사회와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종교 체험에 주목하면서 그것을 ‘히에로파니(hierophanies, 거룩한 것이 세상에 나타남)’라고 명명했다. 그리하여 그의 연구 과제는 세계 전역에서 역사를 통해 나타난 ‘히에로파니’의 형식을 추적하는 데 놓여지게 된다. 여러 종교 전승에 쓰인 상징어를 연구하고, 이 상징어의 뜻을 신비 현상의 기초가 되는 저변의 원시 신화로 환원하려 한 것이다.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는 세계 종교사를 아우르며 이미지와 상징의 세계를 독창적인 관점으로 고찰한 엘리아데의 방대한 사상에서 그 초기의 흐름을 집약하고 있는 탁월한 저작이다. 엘리아데는 세계 각지의 원시사회 대장장이 업(業)과 연금술 특유의 신화, 의례, 상징 들을 심도 있게 고찰한다. 그는 과학사가나 기술사가의 시선이 아닌 철저히 종교사학자의 시선으로 서술한다. 야금술의 문화사, 즉 야금술의 전파 경로를 분석하거나 야금술을 전파시킨 문화의 흐름을 분류하는 식의 역사 서술 방식이 아니라, 야금술 고유의 정신세계를 면밀하게 탐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의 의도는 동서양의 야금술과 연금술의 역사를 단순히 개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물질의 성장을 촉진하는 책임을 확보할 수 있게 했던 태고의 기술을 둘러싼 상징과 신화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추구하는 데 있다.
그의 관심 대상과 영역은 실로 방대하다. 중국 대장장이의 입문의식과 비의, 인도의 요가나 탄트라, 고대 이집트에서의 그노시스, 기독교 신비주의, 아프리카·인도네시아·시베리아의 야금술, 바빌로니아의 연금술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야금술과 연금술의 작업 양상과 통과의례적 구조 및 그 정신세계에서 공통점을 추출해내고, 샤먼과 요가 행자, 신비가 들의 신성성과의 합일 및 신에의 근접을 위한 노력을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엘리아데는 수천 년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인간 존재의 신화적 밑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물질의 완성에 참여함으로써 인간 자신의 완성을 이루고자 한 연금술사의 꿈
기원전 1200년에서 1000년 무렵 아르메니아의 산악 지방에서 공업적 규모의 야금술이 시작된 이래 철(鐵)은 신성성을 지닌 물질로서 원시사회에서 숭배되었다. 철의 출현은 야금술의 의례와 상징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고, 철에 대한 일련의 금기와 주술적 의례가 생겼다. 철기시대의 도래는 인류의 정신사에 울려퍼졌던 수많은 의례와 신화와 상징을 낳게 된 것이다. 엘리아데는 우선 철의 공업적 성공 후에 현실화되고 확산된 상징과 주술적 종교적 복합체를 추출하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그것을 위해 그는 대장장이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대장장이는 무엇보다도 철의 가공자이며, 떠돌이라는 조건(그는 가공하지 않은 금속을 찾아서, 그리고 주문을 받기 위해 늘 이동한다) 때문에 신화, 의례, 야금의 비의가 전파되는 데 주요한 중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전반부는 우선 물질에 대한 원시인의 태도와 원시인이 물질의 존재 양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신의 힘을 깨달았을 때 겪었을 정신적 모험을 추적한다. 원시 도공(陶工)―광부, 야금공, 용광공, 대장장이 등―이야말로 물질의 상태를 변화시킨 최초의 사람들이다. 엘리아데는 물질과 원시인의 관계, 특히 광부 제철공과 대장장이의 의례적 행동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책의 후반부는 연금술에 집중적으로 주어진다. 연금술의 관념체계와 비법을 깊이 있게 탐사하면서 중국과 인도의 연금술에 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왜냐하면 그 지역의 연금술이 비교적 덜 알려져 있고 그러면서도 연금술 비법의 체험적이고도 신비한 특성을 한층 명확한 형태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자연에 참여하는 것, 자연이 점차 빠른 속도로 생산하도록 돕는 것, 물질의 양상을 변화시키는 것, 바로 이러한 것들이 연금술의 근간을 이룬다. ‘현자의 돌’에 의한 인간과 우주의 변성이라는 연금술 작업(opus alchymicum)은 ‘불완전한(덜 익은)’ 금속의 현 상태와 그 최종 상태(금속이 금이 되는 시기)를 나누고 있는 시간적 간극을 제거하는 것이다. 연금술사는 인간이 우주의 시간적 리듬에 개입할 수 있으며, 자연적 결과를 앞질러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개념을 마침내 획득한 것이다.
연금술사의 정신세계와, 광부 야금공 대장장이의 정신세계 사이에 완전한 연속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 물질과의 관계에서 특수한 주술적 종교적 체험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고대의 야금술사, 대장장이와 연금술사가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자연에 대한 태도는 계속 연장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체험은 그들의 전유물이며, 그 비밀은 입문의식을 통해서 전수된다. 그들의 작업 대상은 그들 스스로 살아 있는 동시에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한 물질이며, 그들의 노동이 추구하는 것은 물질의 변형과 ‘완성’과 ‘변환’이다. 다시 말하면 ‘살아 있는’ 광물질 특유의 시간적 리듬에 인간이 개입한다는 의미를 어떤 형태로든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시사회 야금공과 연금술사의 접점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는 책임을 맡게 됨으로써(그들의 작업 속에서 물질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시간의 속도를 촉진하고 마침내 그들 스스로 시간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창조를 완성하고, 세계에 질서를 세우고, 문화의 기초를 닦고, 비의에의 인식을 향해 인류를 인도해간다. 인간은 연금술을 통해서 물질의 완성에 참여하는 동시에 자신의 완성을 견고히 하게 된다.
현대 과학의 진보에 경종을 울리는 엘리아데의 탁월한 통찰
이 책에서 제시되고 있는 엘리아데의 관점 중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연금술과 화학의 관계에 대한 분석이다.
연금술과 화학 사이에 연속성이 있으며, 화학이 연금술에서 태어났다는 일반적인 견해에 대해 엘리아데는 부정적이다. 양자 모두 동일한 광물질에 대하여 작용하고 동일한 장치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전혀 근거가 없지 않지만, 정신의 역사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그 과정과 본질은 다르다는 것이다. 즉 연금술은 ‘신성한 과학’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반면에, 화학은 물질이 그 신성성을 상실한 후에야 비로소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연금술은 화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목적을 추구하였다. 화학자가 물질의 구조를 통찰하기 위해서 물리 화학적 현상에 정확한 관찰과 조직적인 실험을 행한다면, 연금술사는 물질의 변환(화금석)과 인간 생명의 변환(불로장생의 영약, 엘리시르)의 밑받침이 되는, 물질의 ‘수난’과 ‘죽음’과 ‘결혼’에 전념한다. 그러므로 연금술의 관점에서 보면, 화학은 신성한 학문의 세속화이자 ‘타락’이다. 연금술을 전(前)과학적 사고에 의한 창조의 하나로서, 화학의 기초적 단계로서, 다시 말해서 세속적 과학으로서 표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엘리아데는 철저히 연금술사의 관점에서 연금술의 세계를 통찰하고 그 독창성을 가늠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무한한 진보에의 믿음과 과학 정신의 위대함만을 숭배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유용하면서도 반성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현재의 유럽 문화는 물론 산업화 이후의 세계 문명 전체가 과학과 산업의 진보에 요구되는 엄창난 지적 노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영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희생시켜야 했고,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는 방향으로만 치달았다. 현대 과학은 눈부신 비약을 거듭하면서 연금술의 유산을 망각하거나 혹은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유럽 문명이 더이상 인류의 정신적 절정으로, 20세기에 있어야 할 유일한 문화로 간주될 수 없다는 인식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원시 문화와 원시인의 정신세계에 우리의 관심을 돌려야 하는 이유이다. 종교사가로서의 탁월한 통찰을 담은 이 책을 통해 엘리아데가 전하고자 하는 바도 이것이다. 물질의 변환과 성장을 촉진시키고 우주의 시간적 리듬에 개입해 자연의 시간을 대신하고자 한 ‘연금술사의 꿈’은 한낱 몽상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충일함을 위해 현대 산업사회에서 여전히 유의미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1907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나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이탈리아 철학 연구로 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인도 캘커타 대학에서 3년간 산스크리트와 인도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1933년 부쿠레슈티 대학으로 돌아와 요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부쿠레슈티 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5년 파리 소르본 대학 종교학 객원교수가 되었고, 1956년 시카고 대학 종교사 교수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30년 이상을 가르쳤다. 『세계종교사상사』 제3권 집필 직후인 1986년 4월 22일 시카고에서 타계하였다. 주요 저서로 『샤머니즘』 『우주와 역사』 『종교사 개론』 『이미지와 상징』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간』 『성과 속』 『잘목시스에서 칭기즈 칸까지』 『신비술, 마법 그리고 문화적 관습』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