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미학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독일의 대표적인 문예학자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의 『미적 현대와 그 이후―루소에서 칼비노까지』가 출간되었다.
야우스는 형식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동시에 ‘지양’하는 새로운 문예학적 ‘패러다임’으로 수용이론을 구상함으로써 국제적 명성을 획득했다. 그가 구상한 수용이론은 수용자의 권리를 이론적으로 확정함으로써 문학의 수용 일반을 학문적 분석의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그의 업적은 문학과 예술의 역사를 작가와 작품과 수용자가 균등하게 참여하고 있는 미적 의사소통의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규정의 문제들을 대화적 이해로서 새로이 설정하게끔 했다. 수용미학의 전개 과정에서 야우스는 또한 각기 다른 이론적 기원을 지닌 개념들을 도입했다. 가령 로만 잉가르덴에서 비롯된 ‘구체화’/‘구체성’ 개념, 후설과 칼 만하임, 가다머 등에서 유래한 ‘기대지평’ 개념, 그리고 한스 블루멘베르크로부터 차용한 ‘시대문턱’ 개념뿐만 아니라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역사적 시각(Perspektive)의 이론 또한 그의 미학적 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미적 현대와 그 이후 - 루소에서 칼비노까지』에서 야우스는 수용미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그의 이론적 분석에 필수적인 다양한 개념적 도구를 사용하여, 루소에서부터 칼비노에 이르기까지 약 2세기에 걸친 문학 예술의 역사를 미적 현대성의 개념사라는 중심축으로 가로지른다. 계몽주의에서 ‘탈현대적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생산된 미적 성과물들을 폭넓게 아우름으로써 미적 경험의 포괄적인 시대적 연관관계를 밝히고 나아가 미적 경험의 지평 변천에서 드러나는 미적 현대성의 개념사를 추적해내는 것이다. 약 200여 년에 걸친 역사적 과정을 미적 현대(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구축하고 있는 이 책은 위르겐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 견줄 만한 미학적 작업으로서 미적 경험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요구에 답한다.
근현대 서유럽의 철학적 예술적 담론에 대한 폭넓고 유연한 학문적 탐색
이 책은 야우스가 십 년(1978∼1988)에 걸쳐 연구해온 현대성의 개념사를 계몽주의에서 현재까지 진척시키기 위해 쓴 논문들을 묶은 것이다. 논문들의 배열 순서도 집필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 미적 현대의 ‘시대문턱’들의 역사적 순서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야우스에 따르면, 두드러진 몇몇 시대문턱들에 접해 있는 예술들을 매개로 표현되었던 과거의 경험은, 새로이 시작되는 각 시대의 자기 이해를 거듭 숙고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야우스가 설정한 시대문턱들은 결코 자의적인 게 아니라 역사적 탐구의 결과로서 해석학적 연관 속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은 다섯 가지 시대문턱에 맞추어 구성되어 있다.「시작의 신화들」(I)과「장 스타로뱅스키의 현대의 고고학」(III)은 18세기 중엽의 시대문턱에,「반(反)자연으로서의 예술」(IV)과「콜로퀴움을 회고하며 : 사회 예술과 산업 예술」(V)은 낭만주의의 미적 혁명이 일어났던 1789년 이후의 문턱에,「보들레르의 알레고리의 재수용」(VI)과「흔적과 아우라 : 발터 벤야민의『파사쥬 - 작품』에 관한 소견」(VII)은 1848년 이후의 문턱에,「기욤 아폴리네르」(VIII)와「폴 발레리의 노트들」(IX)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인 1912년경의 문턱에, 그리고 마지막으로「이탈로 칼비노」(X)는 ‘탈현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최근의 시대문턱에 각각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역사적 전위(轉位)가 이루어지는 각 시대문턱마다 역사와 자연과 미학의 관계가 새롭게 전개되고 상이하게 발전되는 양상들이, 시대의식과 가장 첨예하게 대결했던 예술작품들에 대한 날카로운 이론적 성찰을 통해 부각된다. 계몽주의 초기, “자유의 잠재력과 억압의 현실을 항상 동시에 발전시키는 진보의 이중성”(아도르노)을 최초로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해결할 수 없었던 루소에서부터, 이러한 모순을 ‘미적 유희’의 힘을 통해 해결하려는 낭만주의의 미적 혁명, 낭만주의와 단절하고 ‘자연의 포에지’를 대신하여 새로운 ‘산업의 포에지’를 발견해냈던 보들레르의 현대성의 미학, 1912년 아폴리네르에 의해 미적 현대성을 대신하여 도입된 아방가르드 개념, 이 개념마저 ‘고전적 현대’로 만들어버린 최근의 탈현대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서유럽의 철학적 예술적 담론에 대한 야우스의 탐색은 그 폭과 깊이에 제한 없이 펼쳐진다.
미학적 탈현대와 새로운 주체 개념의 획득
야우스에 따르면, 사회적 정치적 현대는 아직 미완의 기획으로 남아 있지만 미적 현대는 이미 완성된 기획이다. 그는 ‘우리의 최근의 현대’에 포함되는 미적 경험은 이미 ‘탈현대’로 접어들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탈현대적 미학을 분명하게 하는 범례로서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를 들고 탈현대의 미학적 규준들을 열거한다. 금욕적 모더니즘의 비의적 실험으로부터 감성적 경험과 해석적 향유, 넘치는 풍자와 전복적 해학의 공공연한 긍정으로의 전환, 주체의 죽음 선언으로부터 의식의 탈경계화 경험으로의 급격한 전환, 고도로 산업화된 세계의 현재와 그 새로운 매체에 예술을 개방하기 위해 자율적인 예술작품 및 자기 지시적인 시학의 포기, 나아가 과거의 모든 문화의 거리낌 없는 활용(‘상호텍스트성’), 수용과 영향 쪽으로 미학적 관심의 이동, 그리고 특히 허구적인 것, 상상적인 것, 환상적인 것을 의사소통의 매체로 활용하고 기술화된 우리 세계의 정보 홍수에 맞서 그것들을 동원하기 위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편견 없는 융합 등이 그것이다.
문학적 탈현대를 인정한다고 해서 야우스가 니체에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는 급진화된 이성비판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주체 중심적 이성비판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일체의 의미를 해체하는 부정적 신학이나 익명적인 권력 담론으로의 자기 방기, 혹은 이성과 거리가 먼 자연으로 재정향되는 것은 단호하게 반대한다. 주체를 추방하려 한 이 모든 시도가 궁극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주체·객체 관계로 환원시키는 오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여기에서 그는 더이상 자기 중심적이지 않은 주체개념을 재획득하고자 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확립하는 ‘나뉘어질 수 있는 존재(Dividuum)’로서의 개인(Individuum)이라는 주체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과 자연, 공생계와 주변계의 관계를 미적 입장에서 새로이 파악하기에 적합한 의사소통적 이성의 규범들을 인간과, 함께 사는 인간(Mitmensch)의 상호 인정 속에서 정립할 수 있는 주체개념이다. 이러한 주체개념은 미적 경험의 특징에서 획득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야우스의 바람이다. 야우스에게 예술은 무엇보다도 자발성을 특징으로 하는,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 매체이기 때문이다.
야우스의 이러한 확고한 희망은 위대하고 결코 끝나지 않을 계몽의 계획에 향해 있다. 이데올로기적인 강제기관으로서의 계몽이 아니라 의사소통, 대화, 대화적인 이성, 미적 경험에 향해 있는 것이다. 야우스는 그 속에서 유일하게 계몽의 자유를 보증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계몽의 끝없는 대화 속에 그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혼란스럽고 불투명한 현대성에 대한 이해의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Hans Robert Jau?, 1921∼1997)
수용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야우스는 1921년 독일에서 출생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프루스트 연구로 박사학위를, 중세 문학 연구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뮌스터 대학과 기센 대학을 거쳐 1966년부터 콘스탄츠 대학에 재직하면서 대학 개혁 프로그램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문예학 분야에서 이른바 ‘콘스탄츠 학파’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연구 집단인 ‘시학과 해석학’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수용미학의 선언문’으로 불리는 『문예학의 도전으로서의 문학사』는 16개국 언어로 번역될 정도로 커다란 국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때부터 그는 ‘수용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1987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도전으로서의 문학사』(1970), 『중세 문학의 고대성과 현대성』(1977), 『미적 경험과 문학적 해석학』(1977/1982) 등 일련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퇴임 후에도 왕성한 연구 활동을 통해 『미적 현대와 그 이후―루소에서 칼비노까지』(1989), 『이해의 길들』(1994) 등 수준 높은 연구물들을 발간했다. 1997년 3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