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세계 문학을 이끌어나갈 신예작가 코니 팔멘
첫 장편 『법』으로 유럽 문단에 혜성처럼 나타난 코니 팔멘(Connie Palmen). 그녀의 두번째 장편소설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원제:『우정De Vriendschap』)이 출간되었다. 1955년 네덜란드 루르몬트 근교에서 태어나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코니 팔멘은 1991년 장편소설 『법』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 작품에 대한 호응은 놀라운 것이어서, 삼십만 네덜란드 독자를 사로잡고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되는가 하면 1991년 ‘올해의 유럽 소설’에 선정됨으로써 코니 팔멘에게 단숨에 작가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1995년에 발표된 후속작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은 ‘아코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전작 못지않은 폭발적인 반응으로 코니 팔멘의 작가적 역량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줌과 동시에 그녀를 21세기 세계 문학을 이끌어갈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한 친구와의 특별한 우정을 간직한 소녀, 작가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을 여주인공이 소녀 시절에서부터 삼십대 여성으로 성장하기까지 여성으로서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 나아가 인간으로 성숙하는 과정을 빼어나게 형상화한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은 현대적이고 세련된 성장소설이자 여성소설로서 근래에 보기 드문 뛰어난 문학적 결실을 이루어내고 있다. 여성의 내밀한 심리를 적확하게 꿰뚫는 재치 있는 묘사,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지적이고 유연한 통찰이 코니 팔멘 특유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체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전혀 새로운 방식의 소설을 완성해낸 것이다. 인간관계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흥미진진한 삶의 드라마 속에 펼쳐 보이는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은 새 천년을 맞이하는 현재에도 유럽에서 베스트셀러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문학동네에서는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에 이어 코니 팔멘의 데뷔작 『법』도 곧 소개할 예정이다.
전혀 상반되는 두 여성의 집착에 가까운 우정에 깃들여 있는 삶의 비밀은 무엇인가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은 모든 면에서 서로 상반되는 두 소녀, 키트와 아라의 특별한 우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물과 언어’ ‘허기와 갈증’ ‘일과 사랑’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키트와 아라의 신체적 정신적 성장과정을 따라가면서, 말라깽이와 뚱뚱보 소녀가 자신들만의 우정을 지속하면서 성숙한 여성으로 세상과 대면해나가는 풍경을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의 히로인 키트 부츠는 어느 날 초등학교 운동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아라 칼렌바흐를 보고 한눈에 운명적인 만남을 예감한다. 작고 마른 체구에 책읽기를 좋아하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사물과 현상을 분석하기를 좋아하는 키트와 달리, 뚱뚱하고 무뚝뚝한 성격에 언어 장애가 있고 뛰어난 직관의 소유자인 아라가 키트의 눈에는 신비스럽고 낯선 대상으로 비쳤던 것이다. 키트는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라를 자신의 유일한 친구로 받아들이고 둘만의 관계를 키워간다.
작품의 전반부, 키트와 아라의 어린 시절에는 소녀들 특유의 아기자기한 우정쌓기, 어린 키트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들이 작가의 재치 있는 문체에 힘입어 매우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새의 선물』의 주인공 진희를 연상시키는, 세상과 삶의 비밀을 감지하는 데 민감한 소녀 키트는 어른들의 세상, 또는 주변 세계를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해낸다. 때로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으로 때로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날카로움으로 탐지해낸 삶의 비밀을 나눌 유일한 상대는 바로 키트가 생애 최초로 세상과의 창구(窓口)로 선택한 아라이다. 아라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녀 주변을 맴돌고, 예쁜 그림을 선물하고, 자기만의 일기장을 만들어 그녀와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어린 키트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여성 독자라면 누구라도 추억 한두 가지를 떠올리고 미소짓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하고 세밀하다.
작품의 후반부로 가면서, 키트와 아라의 성장과 함께 소설은 한층 무게를 얻는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경험하게 되는 초경, 남자와의 첫 경험, 상대를 올바로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 등 소녀에서 여성으로 성숙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혼란과 고통이 상반된 성격의 두 소녀에게 투영되고 절절하게 되살아나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키트의 사유가 깊어짐에 따라 인간에 대한, 인간들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이루어짐으로써 소설은 그 깊이를 더한다.
키트와 아라, 두 여성의 교류를 통해 이 소설은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 타인이나 사물에 대한 집착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수년 동안 지속되는 관계란 어떤 것인가. 사람들간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누군가에게 속하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구속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왜 어떤 사람은 술에 중독되고, 또 어떤 사람은 음식에 탐닉하는가. 운명과 선택은 어떻게 다른가. 죄의식, 두려움, 수치심의 정체는 무엇인가. 신, 죽음, 사랑, 행복, 가족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은 단순히 여자들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나’에 이르는 길을 겹겹의 삶의 무늬로 보여준다.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은 어느덧 삼십대가 된 키트가 아라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로 끝을 맺는다. 그 짧은 에세이에서 키트는 지나간 이십 년 세월을 곱씹는다. 그리고 사유방식, 친구 사귀기, 음식이나 술에 대한 탐닉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넌지시 내비친다. 이것은 주인공 키트의 박사학위 논문 테마이자 동시에 작가가 전하는 나지막한, 그러나 오랜 여운을 남기는 메시지이다. 그것은 곧 ‘사랑’함에도 ‘적’일 수밖에 없는 관계의 아이러니, 그러나 어느 한쪽이 없으면 존재 의미가 사라지는, 무한히 얽힌 인연의 실타래, 그 끝없는 결합의 드라마에 다름아니다.
문학과 철학을 절묘하게 결합한 글쓰기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은 초등학교 때부터 삼십대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두 소녀의 이십여 년간의 우정을 다룬 성장소설의 외관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성, 절제와 탐닉 등 장구한 서양 철학사를 가로지르는 화두에 대한 깊은 철학적 사유가 흐르고 있다. 코니 팔멘은 전혀 새로운 글쓰기 방식으로 문학과 철학의 행복한 결합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키트와 아라의 양극적인 관계는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성, 더 나아가 작가와 독자의 관계까지 함축할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하면서도 폭넓은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다. 그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나름의 색깔을 구별해내는 것은 코니 팔멘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