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모습을 바르게 말하기, 말로써 참모습을 바르게 보여주기,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
언어가 오염되고 진실이 오염된 시대에 말이라는 화두를 통해 우리 살므이 숨겨진 진실 찾기
작가 이유범의 두 번재 소설집 『침묵읽기』가 나왔다.
이유범은 1985년 『한국문학』 신인 작품상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8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입선한 바도 있으나 주로 소설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왔다. 그의 소설들은 문학평론가 특유의 예리한 안목과 감수성을 바탕으로 날카로운 비판정신이 깃든 독특한 소설공간을 보여준다.
소설집으로 『거미줄 끊기』오 장편소설 『섬에서 섬으로』가 있고, 평론으로 「자아 감추기와 그 한계-정지용론」 「이인칭 소설의 정체와 그 주변」이 있다.
말(言)에 대한 성찰!
이유범의 소설들은 말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기록으로 읽혀진다. 언어가 오염되고 진실이 오염된 시대에 비일상성의 숨겨진 진실을 캐어내려는 그의 소설은 말이 진실을 전달하지 못하고 거짓된 기교로 전락하여 부당하게 관리되는 시대, 한걸음 더 나아가 진실이 물리적인 힘에 의해 억압되는 시대, 그리하여 저항력과 경각심마저 놓쳐버린 시대의 무서움에 대한 진지하고도 끈질긴 탐색에 경도되어 있다.
그의 첫 소설집 『거미줄 끊기』에서 작가는 서사적 담화의 흐름보다 우리 삶에 내초된 진정성을 추출하는 일에 대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장편 『섬에서 섬으로』는 오염된 말의 본질과 실상에 대한 성찰이 다다른 한 극점을 보여준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이유범의 창작 경향은 전반적으로 말에 대한 탐색을 통해서 우리 삶의 숨겨진 진실을 캐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글쓰기의 행위를 넘어서 밝고 소담스러운 세계를 밝혀놓으려는 힘겨운 싸움에 다름아닌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참모습을 바르게 말하기, 말로써 참모습을 바르게 보여주기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 그의 소설은 이 물음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다.
「침묵읽기」-새로운 소설적 언어사회학!
이 소설집에 수록된 열세 편의 작품을 유형별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잘못된 세상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날선 경각심과 저항의 의지로 맞서는 유형-「불면시대」 「소리」 「겨울날의 일곱 마디」 「회심곡」 「침묵읽기」, 둘째 우화적 수법이 돋보이는 유형 -「얼굴내기」 「귀」 「개구리와 관우」 「임금님의 어느 하루」, 셋째 작가의 체험 위에 피어난 청정하고 맑은 감동의 세계 -「틈새와 잎새」 「새」 「흙내」 「바다꽃」 등으로 대별될 수 있다.
첫째, 세상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건강한 비판의식이 돋보이는 유형의 작품들이다. 먼저 표제작인 「침묵읽기」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마디의 대사도 내뱉지 않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불륜의 주인공인 한 여자가 줄기차게 유부남의 침묵과 나누는 일그러진 대화의 기록이다. 이작품은 말에 대한 집요한 천착을 계속해온 작가의 새로운 소설적 언어사회학이면서 마음과 마음이 화해롭게 악수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져버린 시대의 외로운 단독자로 설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으로 읽혀진다.
그리고 끊임없이 제대로 된 세상을 갈망하며 떠도는 그의 소설들은 거짓에 의해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원론적인 명제를 소설적으로 보여주거나 (「불면시대」), 획일화되고 억압적인 군생활을 배경으로 개별적인 영혼이 남몰래 끌어안고 있는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을 수 있는가(「회심곡」)를 드러내기도 한다. 더 나아가 갈 등에 찬 인간관계로 인한 극심한 내면적 고통보다는 오히려 육신의 절단이 더 편안할 수 있다는 절박한 상황(「소리」)에 가 닿거나, 하층사회를 배경으로 한 겨울추위보다 더 싸늘하게 얼어붙은 마음의 겨울을을씨년스럽게 펼쳐 보이며(「겨울날의 일곱 마디」), 진실된 세상을 찾기 위한 치열한 구도행각을 ?인다.
둘째로 이유범의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우화적 수법? 부조리한 사회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한 윷내기꾼의 집요한 완전성 추구를 통하여 죽음에까지 육박하는 철저한 정신적 고통의 소중함을 비유적 기법으로 그리거나 (「얼굴내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모티프에 의하여 우리 사회 속에 혼재하고 있는 선악(善惡)의 양태를 명료하게 적발(「귀」)해낸다. 그리고 어렸을 적 별명이 개구리였던 주인공을 통해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소중함을 고금을 넘나들며 증명(「개구리와 관우」)하거나 임금님이라는 호치이 붙은 한 노동자의 하루를 시니컬하게 다루기도 한다(「임금님의 어느 하루」). 이렇듯 작가는 우화적인 수법과 비유적이고 미학적인 작품구조를 통하여,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삶의 guswd을 진단하고 그 깊은 바닥에 깔려 있는 허위와 진실의 대칭적인 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셋째, 작가의 체험이 짙게 드리워진 맑고 청정한 감동의 세계이다. 이 역시 말에 대한 성찰이라는 지난 화두의 연장선상에 있다.
고향 유년시절 누님에의 기억 등에 의지해 현실의 곤고한 삶 가운데 비좁게 열려있는 정신적 이탈의 출구를 보여주고 있거나 (「틈새와 잎새」) (「새」) 작가 자신의 석사 농부 시절의 체험이 투영된 맑은 깨달음의 세계 (「흙내」), 그리고 저자의 낙도 교사 시절 체험을 바탕으로 한 교사의 섬마을 방문기 (「바다꽃」) 등을 통해 작가는 거창한 웅변만이 훌륭한 말의 전달수단이 아님을 실증하고 있다.
온전한 세계에의 소망과 작가적 성실성!
이유범의 소설들은 곧 그가 체험하고 감당해온 삶의 다른 이름이다. 말이 진실을 담지 못하고 상업성의 현란한 횡행 속에 비틀거리는 이 시대에 말에 대한 성찰을 계속하고 있는 그의 고집스런 작업세계는 돋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예리한 비판의 칼날을 벼리어왔다. 그 진지하고 끈질긴 작가 근성으로 일상적 삶의 절목들 속에서, 그리고 교단이나 군대와 같은 특정한 분야에서 부조리하게 어긋나 있는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들춰내며, 상하거나 썩은 곳을 헤집어 보였다. 그러한 비판의식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며 그 비판의 지경을 넘어 밝고 소담스럽게 펼쳐져야 마땅한 온전한 세계에의 소망과 동궤의 맥락이다.
문학평론가 문홍술씨는 문학의 매춘행위가 극을 달리고 있는 이때 작가 이유범이 돋보이는 것은 그가 문학의 순수한 영혼을 지켜나가기 때문이라며 "그의 소설에서는 살아 숨쉬는 소설적 진실을 느낄 수 있다. 그 진실은 인간미라고는 전무한 상품 물신주의 시대의 덫에 걸려 있는 우리들의 무딘 감성과 상상력에 큰 활력을 주고 있다"고 그의 작가적 성실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참모습을 바르게 말하기, 말로써 참모습을 바르게 보여주기, 그것은 과연 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