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형식의 산문집, 조용히 되살아나는 생의 풍경들!
인간 존재의 시원을 파헤치는 섬세한 글쓰기로 90년대 한국 문학의 영토를 확장한 작가 윤대녕의 첫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이 출간되었다.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은 여느 산문집과는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의 친절한 설명이 있다.
나는 기존의 에세이나 산문집과는 좀 다른 형태의 글을 쓰고 싶어 우선 편지투의 문장을 택하기로 했다. 또 소설은 아니더라도 전체 흐름이 이어질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의 말대로 이 책의 화자는 우연히 길에서 여인을 만나고, 문득 문득 다시 길 위에서 편지를 쓴다. 낯선 여행지를 떠돌다 마음을 뒤흔드는 풍경과 만날 때, 좋은 음식을 먹고 영혼을 울리는 음악을 들을 때, 기억 속의 시간을 들추다 막막한 그리움과 부딪칠 때, 떠오르는 단상들은 고백체의 편지글에 담겨 그녀에게로 간다. 그리고 헤어짐을 예감하고 쓴 마지막 편지글. 그렇게 그녀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책의 처음과 끝에 두고 작가는 화자에 의탁해서 세상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그 풍경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길어올린다. 그 필치는 시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유려하고 아름답다.
전체 31개의 짧은 단락으로 나뉜 산문집 안에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쿠바, 일본 등의 이국 여행지에서부터 5월의 제주, 낙산의 홍련암, 7번 해안도로, 고창 선운사와 내소사를 지나는 30번 국도, 광화문의 테마 카페 등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길의 풍경이 펼쳐진다. 작가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세세한 여행지의 정보와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는 길 위의 사색은 작가가 의도했듯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엔 30번 국도가 생각납니다. 그 길은 고창 선운사에서 출발합니다. 그곳에 가면 동백꽃이 있고 벚꽃이 있고 미당(未堂)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30번 국도 여행기는 고려시대 도요지를 회상하고, 곰소에 들러 시장 풍경을 살피고, 내소사로 들어가 섬세하게 새겨진 문양을 감상하고, 그림처럼 위치한 ‘왕포 모텔’을 들러 채석강을 찾는다. 옮기는 자리, 묘사하는 풍경마다 잊지 못할 이미지 하나씩을 새기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엔 30번 도로 위에 있고 싶습니다. 그 길은 화엄의 길은 아니라도 분명 달콤한 여수의 길인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과 함께 이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로 끝을 맺고 있다. 이처럼 작가의 여로를 물들이고 있는 막막한 그리움과 유랑하는 정신의 자유는 그녀에게로 향하는 편지이기 이전에 작가가 스스로와 나누고 있는 내면의 대화다. 작가가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들이 마음의 지도를 나침반으로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청춘으로 불리는 나이가 훌쩍 지나 온갖 희망과 기쁨에서 어지간히 벗어나게 되었을 때, 어느 날 나는 말할 수 없이 사무친 감정에 휩싸여 문득 내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있었습니다. 한 가닥 노래로 기억될 뿐인 내 가난한 청춘을.”
“한 여자와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자유롭게 써나갔다. 왠지 새삼스러운 느낌이 든다. 열대의 바람처럼 살아온 남루한 사내의 반생이 눈에 어른거리기 때문일까.”
작가의 고백과 같이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에는 열대의 바람처럼 휘돌았던 소설가 윤대녕의 숨은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은 주로 젊음의 시간 속에 있는 듯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렬한 그리움으로 작가를 사로잡고 있는 열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소설의 배경이 된 장소로 다시 떠나 마음의 풍경을 기록하기도 하고, 소설 속 여인의 그림자와 씨름하기도 한다. “살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고 사랑 때문에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절망이 목까지 차오”르기도 했다던 청춘의 고백이 담뿍 담긴 채로 말이다.
이 책에는 윤대녕 문학의 근원을 엿보게 하는 내면의 풍경이 곳곳에 숨어 있다.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도 그 풍경의 전언을 돕는다. 소설가 배수아는 ‘유랑과 여성성’이라는 두 단어로 그 풍경의 핵심을 붙잡고 있다.
유랑과 여성성. 그의 글을 읽기 위해서 이 두 가지를 먼저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침묵을 택한다면, 나의 이 모든 말은 한낱 열대의 바람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의 글은 우리 모두의 뜨거운 낮잠 속에 나타난 꿈과 같았다.
그가 멀고 먼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내가 본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감색 플랫 슈즈, 낮게 기울인 그의 시선, 마른 몸의 그림자, 섬세하고도 단호한 목소리의 여운, 배낭 한켠에 피어난 선사시대의 제비꽃, 마른 빵과 한줌의 소금…… 그리고 타고나는 자만이 얻는 그런 글이다. 그는 어쩌면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 존재란 과연 무엇일까 의문에 사로잡힌다. 내가 본 것은 윤대녕보다 더 윤대녕에 가까운, 육체보다 더 에로틱한, 존재보다 더 존재하는 것, 윤대녕의 중력이다.
―배수아(소설가)
조용히 되살아나는 생의 풍경들-
윤대녕 여행 산문집 출간
인간 존재의 시원을 파헤치는 섬세한 글쓰기로 90년대 한국 문학의 영토를 확장한 작가 윤대녕의 첫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작가의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품고 있는 깊은 사연들, 기호들... 이들과 어울려 펼쳐지는 길 위의 사색은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