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마르시아스 심이 신작 소설집『명옥헌』을 펴냈다. 심상대가 쓰고 마르시아스 심이 펴냈다고 할 수 있는 이번 소설집에는 연작소설 『떨림』을 전후한 신작들과 이러저러한 작가의 고려로 그간의 창작집에 묶이지 못했던 중단편 11편이 실려 있다. 이 소설집의 자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친절한 작가의 설명이 있다.
이제 『명옥헌』이라는 표제로 출간하는 이 소설집은 실은 이미 팔 년 전에 완성된 원고였다. 그때 출간했더라면 다른 제목이 붙었겠지만, 지금에는 이전에 포함시켰던 두 편의 작품을 빼고, 1994년 초에 발표한 「명옥헌」과 2000년 초에 발표한 「마르시아스」라는 작품을 추가했다.
그런데 이 작품집의 의미는 5월 광주를 문학의 자리에서 정면 돌파하려 했던 작가의 광주 시절과 분리할 수 없다.
이제 보니 나는 1991년에서 1993년에 걸친 이 년여의 광주(光州) 생활 동안 겨우 단편소설 세 편을 썼다. 「감방일기」 「압록강 풍경」 「무릉도원」이 그들인데, 그 가운데 「무릉도원」을 다시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나로서는 가장 힘든 시절 가장 힘들게 쓴 작품이었으므로 힘들어하는 내 모습이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이 작품을 쓴 뒤 나는 광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고 살아가려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 뒤 고향에서 어렵게 어렵게 쓴 작품이 「명옥헌」인데, 이 작품에 드러나 보이는 휘청거림과 떨림은 당연히 당시 내 모습이다.
해설을 쓴 강상희 교수는 "마르시아스 심의 현재적 성취와 미래적 가능성의 모든 씨앗이 바로 이 『명옥헌』에 파종되어”있다고 말하면서 "내면적인 심미주의자가 어떻게 기지와 통찰에 넘치는 심미적 이야기꾼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는지, 강원도 토종 심상대가 왜 마르시아스 심이라는 혼성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모험과 방랑의 편력기"라고 이번 소설집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
맨 앞에 실린 「마르시아스」는 작가 자신이 ‘심상대’라는 본명을 두고 ‘마르시아스 심’이라는 필명을 선택하기까지,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의 근거를 자신감 있는 육성으로 들려주는 작품이다. 태양신 아폴로와 피리 불기 경쟁을 벌이고는, "좋다, 나는 패배자다! 너는 승리자인 천상의 신이지만 나는 지상의 신인 디오니소스의 친구이자 숲과 들판의 정령이며, 농부의 신이고, 사랑에 빠진 여자들의 애인이며, 패배자인 마르시아스다...... 네가 신이라면 나는 예술가다!"라고 외치는 반인반수의 마르시아스. 이같은 외침에 드러나 있는 치기와 오만이야말로 작가의 삶을 택한 사람의 가장 숭고한 에너지이며, 방종으로 보이는 일탈과 파격이야말로 작가의 예술관의 핵심일 것이다.
작가로서의 운명을 택한 마르시아스의 자의식은 「작가와 작품과 독자에 관한 소묘」를 통해 발현된다. 우연히 기차 옆자리에 앉게 된 사관생도에게 곁에 앉아 잠만 잔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며, 자기가 글쓰는 사람임을, 자기가 소설가 심상대임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나’. 그런 ‘나’는「말끝 이어가기 놀이」같은 작품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작가는 한 문장의 꼬리를 물고 다음 문장을 쓰는 형식을 통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작가의 운명을 밝히고 있는데 시인 황지우는 이를 ‘천일야화’의 화자에 비유한다.
심상대는 자신의 작품을‘세계 명작’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나는 이 뻔뻔스러운 뻥이 느끼하기는커녕 마냥 즐겁다. 과연 그의 소설에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입심에서 나오는 즐거운 요설, 즉 ‘텍스트의 쾌락’이 가득하다. 이야기하기를 그치면 죽게 되어 있는 천 날 밤의 화자와도 같은 작가의 숙명이 그의 이번 작품집 『명옥헌』에 내장되어 있는 비밀인 듯하다.
하지만 마르시아스의 요설의 밑바닥에는“유리병 속의 파리”(「말끝 이어가기 놀이」) 같은 삶의 비극성에 대한 자괴, 문장의 연속성과는 달리 불연속적으로 고립된 현대적 삶에 대한 비감이 가로놓여 있다. 마르시아스 문학의 또다른 측면, 농도 깊은 서정성의 추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요시코는 결코 묵호에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요시코가 진정으로 가고 싶어했던 곳은 어쩌면 「묵호를 아는가」라는 소설 속에 나오는 묵호와 같은, 산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시코는 그곳을 찾아나섰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게 편지를 했던 것은 아닌지, 그 글을 쓴 내게 매달려 행복이라는 것을 향해 손을 뻗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 마지막 편지에 행복의 의미를 물어보았던 것은 아닌지. (본문 중에서)
삶의 의미 찾기에 대한 작가의 웅숭깊은 시선이 느껴지는 이 대목은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서정적으로 읽히는,「요시코의 편지」라는 작품의 결말 부분이다. 작가가 작중인물로 나서서 한 일본 여성 독자와 주고받은 편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소설 속에 나오는 묵호에 가보고 싶어하는 여성의 애절한 마음을, 지난한 삶 속에서도 반짝이는 행복을 찾고 싶어하는 우리들 마음을 읽는다.
마르시아스의 야화는 우화 형식을 빌려(「신금오신화 제3편」‘열두 신장이 잡된 도깨비를 꾸짖은 이야기’) 제물과 권력과 아첨과 독단에 빠진 도깨비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세상에 딴지를 걸고, "이 늙은 것은 생각도 말고 니 앞길 챙겨라. 양서방도 그러더라. 영순이 영호 뒤는 봐준다고…… 실없이 독을 품고 앉았다가는 니 팔자 내 팔자 될라. 그기 무섭다. 그기 지랄이다"(「저 시퍼런 바다」)처럼 멀기 나는 인간사의 파도를 넘어, 1991년에서 1993년에 걸친 이 년여의 광주생활에 다다른다. 작가 자신이 "나로서는 가장 힘든 시절 가장 힘들게 쓴 작품이었으므로 힘들어하는 내 모습이 선명하게 비치고" 있다고 말하는 세 개의 단편 「감방일기」「압록강 풍경」「무릉도원」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폭풍처럼 지나간 시대의 아픔이 녹아 있는 작품들이다.
마지막 작품이면서 표제작인 「명옥헌」은 1990년대 초반 문인들의 내면 세계와 마음의 흐름을 여로 형식에 담아 서술하고 있다. 슬픔, 새들, 희극(喜劇), 매장(埋葬), 묵호(墨湖) 등 실제 인물을 떠올릴 수 있는 명명법이라든지, 실제 작품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절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어떤 허허로움, 슬픔, 가여움, 애처로움, 없음, 외로움, 안타까움, 아련함, 그리움, 아픔, 떨림 같은 것들을" 견뎌내는 이들을 만난다. 그들은 "공통으로, 글을 쓰는, 백년에 한 번씩 숨을 쉬고 천년에 한 번씩 걸음을 옮기는, 문학이라는 노동을 생업을 택한" 사람들이며, 마르시아스 자신이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예술가의 생이다.
나는 쓴다. 글을 쓸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항상 나를 휘몰고 다니더니, 이제 내게 문득 유머를 던져주면서, 남을 위해 울어보라고 권하는 내 예술가로서의 본능에 감사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 위에 몸을 숙이고 있는 『명옥헌』의 눈동자에 반사된 내 모습의 아름다움을, 내 예술가로서의 본능에 바치는 것이다.(작가의 말 중에서)
신국판/ 334쪽/ 값 8,000원
ISBN 89-8281-365-9 03810
작가 연락처: 017-207-5264
담당편집: 김현정(927-6790, 내선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