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범신 씨의 의욕적인 장편소설 "겨울강 하늬바람"이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인다. 그가 지난 1973녕에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숱한 작품들을 생산하면서 탁월한 이야기꾼의 자질을 발휘, 수많은 고정독자들을 확보해온 작가임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겨울강 하늬바람"은 박범신의 소설에 이미 친숙한 독자에게나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나 다 같이 이 작가가 지닌 또다른 면모를 힘있게 깨닫게 하는 소설이다.
엎드려 받고 싶은 성찬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뿐! 문학은 과연 무엇이고 글쓰기는 무엇에 바쳐져야 하는가?
박범신은 이 한마디의 의문을 남기고 등단 21년 만에 당분간 작품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문학은 내 유일한 사랑이요, 목 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고 칭했던 작가!
이 소설을 이끌고 가는 주된 동기는 한 편의 처절한 복수극이다. 어느 호젓한 강마을에 20여년 전 그곳을 등졌던 사내 준일이 되돌아온다. 그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부모를 죽음으로 몰고간 마을의 세도가 윤씨 집안을 파멸시키는 일이다. 그 수다으로 선택된 것은 마을에 공장을 유치하여 대지주로서 윤씨 가문이 가진 세도의 근거인 땅을 빼앗아버리는 바업이다. 준일은 치밀한 계략으로 마을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토지를 팔게 하고 윤씨 집안을 압박해 들어간다. 준일의 맞은편에 있는 인물인 윤 교장과 그의 받아들은 공장이 들어설 야산이 백제의 고분이 묻혀 있는 유적지임을 들어 준일의 기도에 정면으로 맞선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소설은 새롭게 등장한 가치와 전통적 가치 사이가 대립하고 구성원 모두가 그 두 가치질서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리 모두가 겪어왔고 지금도 그 와중에 있다고 할 과도기적 사회의 형상을 선명하게 그려보여준다. 그러면서 "겨울강 하늬바람"은 저자가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마성(魔性)을 집요하게 추적한 심리극으로서도 뜻깊게 읽힌다.
타인에 대한 폭력의 의도나 그것의 실천을 내용으로 갖는 그 마성은 준일의 가족을 몰락시킨 지난날의 윤 교장에게도 있었고,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에 대한 아무런 의심없이 복수의 일념에 불타는 준일에게도 있으며, 심지어 이 소설에서 관찰자이자 참여자로 주요한 구실을 하는 아이 동모가 준일의 편을 들어 윤 교장의 손자를 무조건 핍박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작가는 그들이 지닌 마성의 전개를 미화시키지 않고 냉정하게 묘사한다. 그 냉정함은 인간에 대한 이 작가의 시선이 무척 비관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소설의 끝에서 작가는, 준일의 힘에 밀리다 마침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윤 교장의 시신을 아이 동모를 시켜 수습케 하고 그 뒤를 동네사람들이 따르게 함으로써 극적인 반전을 가져온다. 준일에게 땅을 팔아넘긴 뒤 더이상 농민도 아니게 되고 공장에 취업할 기회도 결국 박탈당하기에 이른 동네사람들이 그 복수극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미의 반전을 통해 작가는 한과 복수에 집착하는 닫힌 가치관에 대해 용서와 화해라는 열린 윤리의 승리를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언을 깊이 되새겨봐야 마땅할 터이다. 그와 더불어 순탄히 읽히면서도 긴장과 절제미를 과시하는 이 작가의 문체는 "겨울강 하늬바람"을 박범신 문학의 참다운 저력을 뿌듯하게 확인시켜주는 역작으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