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스무 살이라는 이른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한 김인숙은 이후 15년여의 작품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문제작들을 양산하며 우리 시대의 걸출한 젊은 작가로 지속적인 관심과 인정을 받아온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간 내놓은 작품의 편수(장편소설 8권, 소설집 3권)로도 알 수 있듯이 그녀는 80년대에 등단한 작가들 중에서 가장 왕성한 창작욕을 불태우고 있는 작가이며, 90년대에도 여전히 문제적인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들 중의 한 명이다. 그녀가, 세기의 마지막 해 벽두에, 메마르고 위태로운 삶을 사는 현대인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익숙하지만 소중한 화두(話頭)를 던진다. 신작 장편소설 『꽃의 기억』이 그것이다.
작가 김인숙은 초기작 『핏줄』 『불꽃』을 비롯 『긴 밤, 짧게 다가온 아침』 『그래도 너를 안는다』에 이어 최근작 『그늘, 깊은 곳』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중요한 작품들에서 줄곧 ‘진정한 사랑’에 관한 예사롭지 않은 질문을 해왔다. 이번 장편 『꽃의 기억』 역시 순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위한 여성의 진정한 자아 찾기라는 점에서 그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것은 김인숙의 소설세계에서 피해갈 수 없는 화두처럼 줄기찬 주제의식이었다. 작가가 사랑이라는 익숙하고도 보편적인 주제를 이토록 집요하게 탐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꽃의 기억』에 그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애닯은 사랑의 세밀화이자 나아가 인간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
인간은 누구나 어찌해볼 수 없는 자신만의 내밀한 상처를 지닐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 내상(內傷)은 삶을 끊임없이 방황하게 만들고 부초처럼 흔들리게 한다. 상처투성이인 자들, 부질없는 욕망과 미망(迷妄) 사이에서 부유하는 자들, 길을 잃고 헤매는 자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숙명의 존재이다. 김인숙은 그런 자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어떻게 자신의 상처를 사랑을 통해 치유하고, 그 사랑은 또 어떻게 상대의 심지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꽃의 기억』의 인상적인 주인공 박경진과 신지우라는 인물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사랑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애닯은 사랑의 세밀화이면서 나아가 인간 존재의 원초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로까지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요한 모티브인 개인의 상처와 타인과의 사랑의 불가결한 합주(合奏)란 현대인의 보편적인 존재 양식이기 때문이다. 한 남자(신지우)의 여린 실루엣이 뿜어내는 숨결을 통해 자신의 분열된 자아를 회복하는 김인숙의 사랑 찾기는 궁극적으로 불모의 고독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존재 방식을 내밀하게 응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랑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성찰을 담고 있는 것이다. 작가 김인숙이 그토록 집요하게 우리 시대의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매는 까닭도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소설적 열망에서이다.
내 안에, 내 피 속에 스며든 뿌리칠 수 없는 유혹 기어코 자멸을 통해 ‘나’를 소생시키려는 극지의 사랑
김인숙의 신작 장편소설 『꽃의 기억』은 표면적으로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한 여성의 너무도 가슴 아리고 절절한 이야기로 읽힌다. 화자인 박경진은 일곱 살짜리 딸아이를 둔 이혼녀이며 화랑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결혼과 출산과 이혼(남편의 술집여자들과의 변태적인 성관계 때문에 이혼)을 겪으면서 그녀는 맥없이 허물어졌고, 허물어진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가 없는 아득한 시간 속에서 쓸쓸하게 살아간다. 그런 그녀의 주변에 세 명의 남자가 다가온다.
우선 화가 최성택은 형편없는 술주정뱅이인데다가 외면적으로는 개망나니 같은 인물. 그러나 삼십대 화가들의 설치미술전을 기획, 준비중인 그녀에게 뛰어난 미적 감각을 소유한 그의 작품은 중요하다. 그녀는 섭외를 위해 그의 화실을 찾아간다. 거기에 걸려 있는 그의 그림에서 그녀는 “유년부터의 상처와 악몽의 기억들”을 읽어내곤 “저 그림엔 나 자신을 찢어발기고 싶은 욕망이 들어 있어요”라고 외친다. 그리고 이어지는 최성택과의 광포하고 가혹한 섹스. 그녀는 최성택이 발산하는 뿌리칠 수 없는 매혹에 이끌려 이혼 후 처음 다른 남자와 섹스를 가진 것이다.
한편 고객의 소개로 만나게 된 산부인과 의사인 우진석이라는 인물이 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일류 대학을 나왔고 단 한 번의 실패도 거치지 않은 채 최상류층의 세계로 입성한 사람, 지성과 교양과 친절을 지녔으며 흠 잡을 데 없는 사람, 전남편을 너무나 닮은 사람. 한마디로 금전과 사회적 지위가 제공하는 안락의 보증수표 같은 인물인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권태로운 일상을 회생시켜줄 수 있는 떨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가 결혼을 위해서는 자신의 딸을 포기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각기 다른 세계상을 상징하는 인물들인 이들은 둘 다 그녀에게 선택받지 못한다. 미혹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는 그들이 떨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오지만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 이후의 그녀에게는 그들 역시 미망에 불과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만지면 그대로 묻어날 것 같던 고독의 그림자,
그리고 지쳐버린 한 남자의 얼굴.
아득히 먼 듯하면서도 숨이 가쁠 만큼 가까운 이 남자,
이 용납되지 않는 그리움과 간절함……”
이 소설은, 어디선가 공명처럼 그녀에게 들려오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요?”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당신’에서 ‘우리’로, 즉 그녀에서 우리, 즉 그녀와 신지우라는 남자로 바뀌는 그 과정에 이 소설은 의미심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어느 날 그 남자 신지우는 거짓말처럼 그녀의 집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의 집은 “낯선 남자가 홀로 잠들어 있는 집”이 되었다. “내 집의 남자”는 그녀가 출근한 후 아이와 단둘이 아침을 차려먹고 도시락까지 챙겨주고 유치원에 데려다준다. 그는 새벽이면 그녀의 노트북으로 뭔가를 쓰고 그녀가 밤늦게 귀가할 때면 베란다에 나와 홀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우연한 술자리에서 “견딜 수 없는 친화의 느낌”에 이끌려 그에게 단둘이 술 한잔을 더 하자고 제안했고 자신을 집에까지 데려다달라고 부탁한 날 이후로 그는 그렇게 그녀의 집 소파를 차지하고 있다.
신지우라는 남자는 마치 저물녘 쉴 곳을 찾아 헤매는 상처입은 들짐승처럼 그녀의 집에 들어와서는 그녀의 삶에 “가장 극적인 복병”으로 자리잡는다. 그는 누구인가? 그 또한 화가였으며, 그림이라는 미망에 청춘과 사랑을 팔아버렸던 남자이다. 성공을 보장하는 유학을 앞두고 그림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를 버렸고 버림받은 여자는 자살해버렸던 것이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추락한 존재’이다. 떨어질 힘도, 오를 힘도 없는 존재들, 아무런 의욕도 희망도 없는 존재들, 어딘가로 완벽하게 숨고 싶어하는 자들인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거짓말처럼 그녀 집에 들어왔듯이 또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신지우, 그가 떠나면서 남긴 것은 노트북에 들어 있는 ‘SJW’라는 제목의 파일. 그 파일 속에 들어 있는 일기 같은 원고를 통해 그녀는 그의 상처와, 그녀에게 결코 닿지 못한 안타까운 그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 머물렀던 그 이해할 수 없는 남자를 통해 자신의 참된 자아의 모습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된다. 그간 “벼랑과 바닥 사이의 허공에 걸려 있”던 자신은 추락중이었지만 이제 추락의 삶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한 것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소망했던 “나 홀로 서 있는 나의 자리”를 찾은 것이다.
부유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치밀하게 그린 김인숙의 아주 내밀한 소설
김인숙의 신작 장편소설 『꽃의 기억』은 이렇듯 절망적인 삶을 사는 한 여성의 진정한 자아 찾기를 세밀한 필체로 정교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제각각 이 세계의 다양한 상(象)을 상징하는 남자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욕망과 미망의 굴레를 떨치고 존재의 바닥까지 가라앉는 진정한 사랑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주인공 박경진의 모습은 이 시대 부유하는 현대인들의 정직한 초상이 아닐 수 없다. “우아하고 고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바깥의 나”를 끊임없이 경멸해대는 “내 안의 나(내 안의 두더지 머리)”라는 분열된 자아에 대한 작가 김인숙의 통찰은 이 작품을 인간 존재에 대한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담은 문제작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 작품은 “작가 김인숙이 한순간도 놓지 않았던 화두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는 “하나의 화두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한 존재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눈부신 비약이 있으며 또한 자신의 것까지를 포함한 기존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보편성을 창출해내는 진경(眞景)이 있다”는 문학평론가 류보선의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