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비평의 빛과 그림자―『현대 문학·문화 비평 용어사전』 출간
세기말―한 시대의 마감이 가져온 한국 비평의 새로운 양상들
20세기의 마지막 십 년을 거치는 동안 비평이라는 이름의 텍스트 해석, 평가, 비판 활동은 유례가 드문 변화를 겪었다. 첫째, 비평의 분야가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등과 같은 제도화된 예술 형식의 범위를 넘어 대중생활과 문화의 갖가지 형식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영화를 비롯하여 각종 대중문화의 텍스트를 읽는 작업이 대중문화의 재인식에 대한 시대적 요구와 맞물려 비평계의 일대 유행을 이루었다. 그 전통적으로 한정된 범위를 넘어선 비평의 동향은 ‘문화비평’이라는, 개념은 다소 모호하지만 문화계의 일각에서 호응을 받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비평에서도 확인된다. 둘째, 여러 분야의 비평에서 포스트구조주의, 해체론, 페미니즘, 맑스주의, 정신분석, 담론 이론, 문화유물론 등과 같은 동시대의 서양 이론을 참조하는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양 이론의 영향 아래 전통적인 비평 용어와 개념의 대대적인 수정과 교체가 일어났고, 비평의 중점이 ‘교양’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작업에서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가정을 비판하는 작업으로 옮겨갔다. 비판적, 학제적 성격이 짙은 이론 지향의 비평은 한국 비평에 부상하고 있는 유력한 세력 중의 하나이다. 지난 십 년 사이에 비평에 나타난 새로운 추세가 시대의 정치적, 문화적 요구에 응답하는 비평 활동의 중요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새로운 세기의 비평은 특정 예술이나 학문의 경계를 넘어 문화적 표상과 담론에 관여하고, 비판적 의식에 기여하는 해석과 이론을 산출함으로써 그 살아 있는 권능을 입증할 것이다.
가장 혁신적인, 그러나 가장 충실한 비평 용어사전
이러한 비평의 새롭고 유망한 가능성을 생각하면 이번에 출간된 『현대 문학·문화 비평 용어사전』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사전일 것이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되고 동국대 황종연 교수가 우리말로 옮긴 이 사전은 현대 문학비평과 문화비평에 있어서 가장 혁신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의 흐름을 반영한 최신 비평 용어사전이다.
맑스주의, 정신분석, 페미니즘,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기호학, 해체론, 신역사주의, 문화유물론, 포스트식민주의 등과 같은 현대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용어들, 현대 문학사와 예술사에 등장하는 각종 아방가르드운동에 관한 용어들, 그리고 문학, 미술, 영화, 대중문화 이론 및 비평에서 널리 쓰이는 용어들이 500여 개에 달하는 표제어로 정리되어 있다. 이 표제어들을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로 서로를 연결하여 최대의 학습 효과를 이끌어내는 본문 체재도 돋보인다. 각 표제어 항목 해설마다 덧붙인 참고문헌 목록과, 국내에 번역출간된 참고문헌 목록도 학습자의 편의를 고려해 첨가되어 있다.
표제어들이 현대 비평의 최신 사조를 적절히 반영했다는 점 외에도, 지식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현대 비평의 일반적 추세를 충실히 대변했다는 점, 현대의 사상가와 비평가들이 공유하는 이론적 개념을 요령 있게 소개했다는 점, 그리고 특히 최근 들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문화비평 분야에 비평 용어사전으로서는 최초로 주목했다는 점에서 단연 돋보인다.
『현대 문학·문화 비평 용어사전』이 주목한 분야, 용어, 그리고 독자
새로운 세기에, 가장 성장이 빠르고 가장 도발적이며 장래에 성과를 올릴 가능성이 가장 많은 분야는 문학비평과 문화비평, 그리고 문학이론과 문화이론이다. 이들로부터 생산된 수많은 전문 용어들이 이제는 우리의 일상적인 문장과 언어 속으로 들어와 쓰이고 있을 정도로, 이들 분야는 급속도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문화연구와 문학연구가 지나치게 소수끼리만 통하고 있으며 따라서 일반인은 접근하기 어려운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론과 비평 연구에서, 비평의 언어를 부주의하게, 독자에게 개의치 않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까닭이다. 문학·문화 분석·영화·역사·예술 그리고 여러 가지 사회과학에서 학술 공용어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정확하고 기술적인 용어 대신에, 문외한들은 거의 알아듣지 못할 용어가 이론에서는 생산되어온 것이다.
『현대 문학·문화 비평 용어사전』은 이러한 요구에 충분히 다가가 응할 수 있는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전은 이론과 비평 훈련을 정식으로 받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이론과 비평의 어휘를 기본적으로 구사할 줄 알았으면 하는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고안되었다. 이 사전에 수록할 용어를 선정하기 위해 택한 원칙은 전문 독자들과 비전문 독자들이 가장 공통적으로 접하는 용어를 고른다는 것이었다. 또한 현대 문화에서 이론과 비평은 전통적인 것도 있고, 최근에 창시된 것도 있는 다양한 학문 분야를 원용하고 있는 잡종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폭넓은 범위의 용어들이 선택된 경우도 있다. 다만 어느 학문 분야에 유독 국한되어 있거나 초점이 보다 좁게 잡힌 다른 참고 서적에 얼마든지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개념과 용어는 제외했다. 따라서 이 사전에 실린 용어 중에는 엄밀히 말하면 다른 학문 분야, 이를테면 정신분석, 철학, 게다가는 영화이론 등에 속한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 모를 용어들도 있다. 그런 용어들이 실린 것은 그것들이 현재의 문학연구, 문화연구, 미디어연구에서 전용되고 있는 데다가 중요한 역할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우리가 목표한 것은 널리 통용되고는 있으나 이런 종류의 사전에는 흔히 등장하지 않는 용어와 개념에 관하여 간결하면서도 쓸모 있는 정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사전에 나와 있는 용어 해설은 비평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씌어졌기 때문에 비교적 간결하고 명확하다. 전문 독자들과 비전문 독자들이 가장 공통적으로 접하는 용어들이 망라되어 있는 것이다. 용어에 관련된 많은 지식을 놀라운 솜씨로 축약하고 용어를 둘러싼 쟁점까지 명쾌하게 정리한, 보통 사전류의 저작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해설이 에세이 형식으로 담겨져 있다. 게다가 각각의 용어에는 해설과 함께 주요 영문판 참고문헌이 밝혀져 있어서 실용적인 효과가 높다. 현대 비평의 새로운 동향과 어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사전에서 믿고 따를 만한 안내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새롭고 엄정한 한국 현대 비평 담론의 출현을 기대하며
『현대 문학·문화 비평 용어사전』에 실려 있는 용어의 대다수는 현재 한국의 문학비평과 문화비평에서는 물론이고 인문사회과학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그러나 모든 전문 용어가 그렇듯이 비평 용어는 많은 쟁점들을 수반하고 있고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개념이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정확히 사용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더욱이 한국어처럼 비평 용어를 번역해서 쓰고 있는 특수한 언어 속에서 비평 용어의 정확한 구사는 더더욱 쉽지 않다.
우리는 많은 비평 용어들이 그 이론적 맥락에 대한 면밀한 이해 없이 혹은 단순한 수사적 동기에서 제멋대로 사용된 결과 그 원래의 개념이나 효과가 사라지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용어 사용의 혼란은 현대 서양 이론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에 놓여 있는 최근의 비평에 특히 심각해서 비평가끼리의 소통에도 지장이 있을 정도이다. 같은 용어를 번역한 여러 용어들이 함께 유통되고 있는가 하면,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식과 혁신적인 방식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사용중인 모든 비평 용어를 마치 표준어를 제정하듯이 통일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닐뿐더러 바람직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비평 용어를 정확히 사용하기 위한 노력은 비평의 창달을 위한 다른 어떤 시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용어의 정의, 개념, 함축, 효과를 엄정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비평 담론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한 사유의 모험을 추구한다고 해도 무의미한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 『현대 문학·문화 비평 용어사전』은 새롭고도 엄밀한 비평 담론의 출현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비평의 세계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 문학 및 문화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고자 하는 사람들,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언어 게임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