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인으로는 보기 두물게 관능에 대하 몰입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노래한 김형영 시인의 첫 시집. 첫 시집 『침묵의 무늬』를 출간한 지 어언 삼십 년. 그간 김형영 시인의 시 세계는 개인적 이력과 연관돼 현저한 변화를 거쳐왔다.
지금은 절대자를 향한 성찰과 회개를 통해 맑고 투명한 삶을 갈구하고 있는 시인. 그러나 젊은 날의 그는 이와는 사뭇 다른, 인간의 동물적 본능과 원시적 야수성, 악마주의적 요소에 심취해 있었다. 삼십 년 만에 다시 자신의 시를 들여다보며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던 내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아 두렵다”(「자서」)고 말하는 시인의 감회가 남다를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의 시를 새로이 접하게 되는 독자들에게는 시인의 젊은 날의 시편들이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시인의 초기시는 서정주의 초기시가 지닌 원시적 야수성과 박목월의 초기시가 지닌 절제의 미학을 적절하게 결합시켜 독특한 효과를 내고 있다. 육체에 갇힌 개별자의 비극과 천상에서 지상으로 추방당한 존재의 비애를 압축되고 정련된 언어로 드러낸 시인. 그래서인지 시인의 시에는 육체성-동물성에 대한 매혹과 혐오, 관능의 추구가 초래한 환희와 허무라는 이율배반적인 측면이 동시적으로 나타난다.
눈부신 빛을 희구하면서도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모습은 「갈매기」와 「뱀」에 잘 드러나 있다. 하늘을 날아야 하는 ‘비둘기’는 “목에 바다를 감”고 추락하고 땅을 기어야 하는 ‘뱀’은 알록달록한 무늬를 “하늘로/날름대”며 “먼동”을 솟아오르게 한다.
새빨간 하늘 아래 이른봄 아침 목에 바다를 감고 죽은 갈매기 -「갈매기」 전문
알록달록한 무늬를 쏟아지는 하늘로 날름대는 뱀이여 네 혓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먼동. 순수한 네 부름에 불려간 육체는 미지의 하늘에 박힌 뱀이여, 언제나 널 따르는 동란(動亂)을 노래한다. -「뱀」 전문
천상적인 것이 하강하고 지상적인 것이 상승하는 공간의 전도는 시인이 “나의 악마주의”라 부른 정신의 소산이다. 이는 천상을 향한 초월을 동경하면서도 지상에 묶인 존재로서의 자의식과 고뇌를 외면할 수 없는 화자의 내면을 드러내준다. 젊은 시절, 악성빈혈로 투병하며 병마와 벌인 신산한 싸움은 시인을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만들었다. 한 인간으로서의 이러한 고비는 관능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대극적인 힘이 충돌하는 긴장된 공간에서 시인을 떠나보내고 삶과 죽음을 관조하고 자아의 구원을 모색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