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고 있는 김영하의 첫 소설집 『호출』의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1997년 초판이 나온 지 근 십 년 만이다. 데뷔작인 「거울에 대한 명상」을 비롯해 「나는 아름답다」「전태일과 쇼걸」「도드리」「도마뱀」 등 모두 열한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1994년 11월부터 1997년 7월까지, 약 삼 년 동안 쓴 것들이다. 『호출』은 첨단의 상상력과 날렵한 호흡, 차갑고 세련된 감수성 등 김영하 문학의 특장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90년대 한국문학의 뛰어난 성과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등단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올라선 김영하의 신세대적 패기와 비범한 역량이 녹아 있는 초기작들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새롭고 매혹적이다.
『호출』은 20세기 말을 배경으로 현대사회의 표피적 삶과 소통 불능의 욕망에 좌절하거나 병적 나르시시즘과 자기 기만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를 위해 작가는 90년대적 일상의 지표를 드러내는 소재인 호출기, 컴퓨터게임, 영화나 음악 등 대중예술의 여러 장르 등을 차용하거나 환상과 현실을 모호하게 뒤섞고 폭력과 죽음과 에로티시즘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동원한다. 물질적 정신적 구조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의 어두운 틈새에서 고립된 일상을 꾸려나가고 있는 개인들의 단절과 고독, 소외와 불안의 문제를 집요하게 투사하는 건조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사뭇 돋보인다. 무엇보다 동시대의 구체적 현실과 그 구성원들의 내면세계를 모험적인 스타일과 낯선 상상력으로 묘파함으로써 이전 세대의 정신과 감각을 자극하고 우리 소설이 발 디디지 못한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호출』은 여전히 의미심장한 의의를 갖는다.
소설집이 나온 것은 1997년 9월 1일이었는데 나는 그로부터 며칠 후 도망치듯 터키로 떠나 보름이나 그곳에 머물렀다. 언론과의 인터뷰는 이틀 만에 몰아서 해치우고 황급히 짐을 챙겼다. 그때는 이런저런 말로 그 여행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이 소설집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리비도와 분노, 불안과 자기 연민 등이 복잡하게 뒤섞인 이 소설집이야말로 황폐했던 젊은 날의 내 영혼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울 같은 책이었다. (……) 우주가 한 점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듯 한 사람의 작가가 쓴 수많은 소설도 시초에는 하나의 점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나는 믿는다. 나의 소설세계에 그런 점이 존재한다면 그 점은 아마도 이 책에 있을 것이라고 또한 믿는다. 개정판 ‘작가의 말’ 중에서
욕망이 무로부터 무엇인가를 산출한다는 것, 현실의 환상적 왜곡을 통해 움직인다는 것은 김영하의 소설이 포착한 중요한 욕망의 논리이다. 그것은 환상을 현실보다 더욱 리얼하게 체험하는 첨단의 감각적 삶에 대한 인식과 맞물려 있어서 특히 인상 깊다. 어떻게 말하든 시뮬라크르 문명세대의 감각에 충실한 김영하의 유려한 기예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황종연(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과 교수)
김영하의 소설이 머금고 있는 스펙터클의 폭은 아주 넓다. 죽음 문제에서부터 현대문명의 심각한 질병인 나르시시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리얼리티, 소통이 가로막히고 그래서 의미의 교환이 위협당하는 시대의 풍경 등에 이르기까지 이 신예작가는 현대의 일상을 아주 다각적으로 파고들고 있다. 이성욱(문학평론가)
* 개정판 1쇄 발행 | 2006년 9월 29일
* ISBN 89-546-0150-2 03810
* 128*188 | 376쪽 | 9,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