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마저도 비속해지고 부박해지는 세태에 대한 순결한 저항 「개밥풀」을 통해 독자들과 친숙해진 이후, 민중들의 구체적인 생활과 우리 농촌현실에 대한 세심한 관찰, 분단 극복을 통한 통일의 염원 등을 노래함으로써 우리 시대 중요한 시인으로 자리잡 은 이동순 시인의 새 시집 「꿈에 오신 그대」가 출간되었다. 이동순 시인은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마왕의 잠이 당선되어 시단에 등장, 1980년 첫 시집 「개밥풀」을 펴냄으로 써 촉망받는 신진시인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어 「물의 노래」(83), 「지금 그리운 사람은」(86), 「철조망 조국」(91), 「그 바 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92), 「봄의 설법」(95) 등의 시집을 통해 선비정신에 입각한 깨끗하고 단아한 작품세계를 심화 시켜왔다. 1987년 제5회 신동엽창작기금을 수혜했으며,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기도 했다. 현재 영남 대 국문과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꿈에 오신 그대」는 한마디로 연애시집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단순한 연애시이기 이전에 사랑마저 비 속해지고 부박해지는 세태에 대한 순결한 저항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보여주는 사색의 깊은 묘경에서 길어올린 엄정하고도 단아 한 아름다움은 오히려 단순하다. 멋을 부리려고 애써 노력하는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때묻지 않은 애정으로 바라보는 만 상에 대한 긍휼함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애감정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극진한 그리움, 주체와 타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온몸을 다한 일치의 감정이다. 주체와 객체, 계급과 계층간의 구별을 허물어뜨리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끼리 하나가 되게 하는, 심지어 삶과 죽음의 구별조차 허물어뜨리는 통합과 일치의 작용으로서의 ‘합일’의 바탕은 다름아닌 사랑이다. 「꿈에 오신 그대」는 바로 이러한 ‘사랑’을 다룬 시집이 다. 민중들의 생활현실과 민족분단의 고통에 대해 노래하던 지금까지의 이동순 시와는 다르지만, 민중에 대한 끈끈한 애정, 통일 에 대한 끝없는 염원의 발원지가 결국 ‘사랑’의 감정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길을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다.
사랑을 일깨우는 대상은 사랑하는 사람 외에도 많다. 별, 달, 꽃, 바람, 비, 눈, 서리, 가을, 홍시, 백합, 담쟁이, 물, 얼음 등 무수히 많은 사물들이 모두 사랑을 일깨워주는 것들, 아니 사랑을 생각게 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이 사랑을 일깨워준다기보다 는 사랑을 생각게 하는 것은 이 시집에서의 사랑이 현재진행중인 것이 아니라 이미 떠나버린 사랑이며, 그러나 아직 잊을 수 없 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케 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은 꿈이다.
꿈길에
발자취가 있다면
님의 집 창밖
그 돌계단 길이 이미 오래 전에
모래가 되고 말았을 거예요
|꿈길 중에서
현실적으로 님을 만날 수 없는 시의 화자는 꿈속에서라도 님을 만나러 간다. 비록 꿈속에서이지만 너무 자주 가기에 님의 집으 로 가는 돌계단길이 닳고 닳아 모래가 되어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꿈에 오신 그대」는 이와 같이 이별한 사람들의 꿈속 세계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꿈’이란 반드시 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리워하는 이에겐 모든 현실이 꿈이 어서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꿈꾸듯 님에게로 향한다. 그대가 별이면 나는 그대 옆에 뜨는 작은 별이 되는 꿈을 꾸고(그대가 별 이라면), 그대가 첫눈이라면 나는 첫눈을 맨 처음 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첫눈), 그대가 내게로 온다면 나는 꽃다발이 되어 그대에게 안기는 꿈을 꾸고(꽃다발), 새벽에 내렸다가 햇볕에 녹아버리는 서리마저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고(서리 친 아침), 주홍빛 열매로 매달려 있는 홍시마저 그리운 그 사람으로 보이고(홍시), 그리하여 나는 개 짖는 소리만 나도 “ 대문께로 눈<길>이 자꾸”(님 기다림) 가게 되는 것이다.
꿈속에까지 찾아오는 사랑, 아니 꿈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사랑, 아니 예전에는 너무도 깊고 아름다운 사랑이었는데 지금은 꿈속 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시들은 제4부에 모여 있다.
이동순 시인이 80년대 중반 「백석시전집」을 엮어내면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1930년대에 백석과 3년 가까이 동거생활을 했던 ‘자야(子夜)’라는 별칭의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자야여사를 여러 번 만나 그녀의 구술을 토대로 간략한 백 석회고담을 「창작과비평」(88년 봄)에 발표했고, 최근에는 자야여사의 자서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낼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꿈에 오신 그대」 제4부의 시들은 자야여사를 화자로 하여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 작품들이다.
그대와 함께 살던
청진동 집을 잊지 못하리
비둘기집처럼 작은 옛사랑의 보금자리
눈 오는 밤의 골목
그대 돌아오시던 바쁜 발걸음 소리
지금도 들려오네
대문 굳게 잠긴 채
희뿌연 세월의 먼지를 쓰고
아, 청진동 집은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네
2|청진동 집 전문
청진동은 백석과 자야여사가 함께 살던 사랑의 보금자리였다. 자야여사는 지금은 떠나버린 백석 시인을 그리며 청진동 집의 그 골목을 가본다. 님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집은 “희뿌연 세월의 먼지를 쓰고 (……)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자야여사는 백석 시인과 즐거웠던 시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본다. 님의 등에 업혀 개울을 건너던 일(개울), 화로를 끼고 앉아 서로를 사랑스 런 눈으로 쳐다보던 일(화로), 팔베개를 해주던 일(팔베개)…… 이동순 시인은 이와 같은 자야여사의 추억 속으로 들어 가 자야여사를 화자로 그리움의 시를 쓴다. 그 시들이 이 시집의 제4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들이 반드시 자야여사와 연관해서 해석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자야여사의 애틋한 사랑이 이동순 시인의 시적 감수성 속으로 들어와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보아 「꿈에 오신 그대」는 전체적으로 연애시 내지 연가(戀歌)의 형식을 통해 시인의 고독한 내면세계에로 침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방법은 자연에 대한 관찰과 지난날에 대한 회상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이러한 애틋 한 시편들이야말로 자꾸만 메말라가는 고독과 상실감을 이겨내는 힘이 될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