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의 작가적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장편
시에서 소설로 전업한 후 아름답고 향기로운 문체와 천진난만한 익살, 훈훈하고 정감어린 얘기들을 담은 두 권의 창작집으로 주목받는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중견작가 이병천씨의 장편소설『저기 저 까마귀떼』가 출간되었다.
장편『저기 저 까마귀떼』는 이병천의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의 작가적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순진한 어린 화자가 악의 세계를 체험하면서 삶의 숨은 진실들과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삶의 실제 무늬를 발견해내는 그의 소설의 특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또 한편으로 자잘한 일상의 모습들을 정감어리게 싸안으며 가슴을 저리는 감동과 지난 시절의 고즈넉한 풍경을 입심 좋은 이야기꾼의 솜씨로 전해준다. 짚더미 어둑어둑한 들판을 날아다니는 까마귀떼의 생생한 날개짓 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 우리들의 아스라한 저쪽 기억들을 한 점 거짓없이 끌어다 펼쳐보이는 이 작품은 아름답고 따스한 삶의 속살을 투명한 수채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엉킨 실타래 같은 삼각관계가 소설의 큰 줄기
소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시험에 떨어졌던 열세 살의 나가 그해 겨울과 초봄, 몇 달 사이에 겪은 일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읽는 이를 60년대의 삶과 추억으로 훌쩍 데려가는 이 소설의 큰 줄기는 서운이 누님을 사이에 둔 설우형과 어풍이 아저씨의 엉킨 실타래 같은 어수선한 삼각관계이다. 이 삼각관계는 화자인 용수가 설우형이 사냥한 꿩고기를 서운이 누님에게 전해주는 과정에서 표면화된다. 꿩고기가 어풍이 아저씨의 손에 들어간 걸 알고 분노에 휩싸인 설우형이 서운이 누님을 살해할 지경에 이르게 되자 용수는 어풍이 아저씨의 방송국에 불을 질러버린다. 그로써 모든 갈등이 해결되고 정화되며 파국은 사라진다.
그 사이에 까마귀떼를 쫓아다니며 시천(詩川)가에서 시를 쓰는 원주형의 얘기, 훈장으로 받은 여자 베트콩의 머리카락으로 드러나는 설우형의 월남 참전의 상처, 그리고 초댕이 저수지의 하얀 물빛과 동생 송아지의 죽음, 어린 향희의 젖가슴을 만지며 나눈 사랑, 방화 사건으로 인한 설우형의 멍석말이 재판 광경 등 불과 몇 달 사이이지만 몇 년에 걸쳐 일어날 법한 일들이 시골 마을의 하늘을 나는 까마귀떼처럼 소설을 채우고 있다.
따뜻하고 아름답고 그리운 지난 시절 우리들 추억의 음각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매우 뚜렷하고 특징적이어서 강한 인상을 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시만 쓰는 실패한 시인 원주형, 월남 참전의 상처를 안고 사는 말더듬이 설우형, 라디오 하나로 유선방송을 하는 바람둥이 어풍이 아저씨, 딸이라서 서운하다는 얘기가 그대로 이름이 된 이쁜이 서운이 누님, 이제 막 피어나는 참꽃 봉오리처럼 봉긋하게 솟아오른 어린 젖가슴을 가진 기집애 향희 등. 그 인물들은 지난 시절 따뜻하고 아름답고 그리운 우리들 추억의 음각화이기도 하고 이웃같이 정감어리며 친숙하기도 하다. 시인 안도현은 오죽하면 "나도 이 소설 속 향희 같은 여자를 갖고 싶다"고 하였을까. 또한 특징적인 인물들 못지않게 어린 용수와 향희의 불꽃 같은 첫사랑, 소아마비에 걸린 동생 송아지의 죽음, 방송국 방화 사건 등 감칠맛나고 흥미로우며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이 소설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어린 날의 막막하던 슬픔과 분노를, 유년의 쓰리고 아름다운 추억을, 사람살이의 애절한 풍경들을 유려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장편『저기 저 까마귀떼』는 절로 빨려들어 짠 눈물을 흘리게 하고 뭉클한 감동도 안겨주는 중견작가 이병천씨의 역작이다.
"내가 건너온 그 세월의 강이 험하고도 굴곡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그때의 아픔들이 내 몸을 들쑤실 때면 언제나 한 소년이 훌쩍거리며 마을 고샅길을 돌아나오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나는 그애를 자주 만나곤 했다. 그 울음을 달래기 위해, 그애를 위해 이 소설을 썼다"(「작가의 말」에서)고 말하는 작가 이병천씨는 1956년 전주에서 태어나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우리의 숲에 놓인 몇 개의 덫에 관한 확인」이 당선돼 한동안 시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198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더듬이의 魂」이 당선된 후 소설에 주력해 왔다. 『사냥』『모래내 모래톱』등 서정성과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이 잘 결합된 두 권의 창작집을 상재했으며 조선시대 말기를 배경으로 한 무인의 역정을 그린 독특한 장편소설『마지막 조선검 은명기』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