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시를 대표하는 강은교의 세번째 시집
1977년에 출간된(민음사 刊) 강은교 시인의 세번째 시집 『빈자일기』는 이 시인의 초기시를 특징지었던 허무의식과 죽음의 예감이 보다 깊어진 동시에 새롭게 부상한 사회역사적 관심사에 대한 폭넓은 성찰이 빛을 발하는 시집이다. 텅 빈 듯한 풍경, 퀭하니 뚫린 밑바닥, 삶의 허전함, 있음의 헛됨 등이 도처에서 발견되는 초기시의 허무의식―삶의 바닥에 깔린 허무, 삶 자체의 허무―을 한층 심화시키고 나아가 살아가는 일의 끈질김, 이웃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의 기쁨,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함께 가질 수밖에 없는 분노와 절망을 노래함으로써 『빈자일기』는 강은교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허무의식과 윤회사상에 바탕한 도저한 세계인식
강은교의 시는 화려한 상상력의 전개, 주술적 시어의 구사로 매우 예민하고 신선하다.
그가 보여주는 허무의 심연은 삶과 더불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삶 이전에 추출해낸 것이어서 감수성의 절정이 이루어내는 깊은 삶의 인식에서 연유하고 있다. 죽음을 겪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명징함, 평안함, 너그러움 등이 그의 시에서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죽음을 통해 삶 속으로 깊고 넓게 침잠하는 인식의 확대과정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다. 한번의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은 일종의 윤회사상이라 할 수 있는데, "다시 물이 되고 바람이 될 때, 우리가 풀이 되어", "불타는 재로 된다" 등의 싯구에서 드러나는 바 이 윤회사상은 『빈자일기』의 중심적 흐름을 이루고 있다.
신경림 시인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강은교 시인에게 있어 허무는 윤회사상으로 발전하고, 윤회사상에 바탕한 그의 시는 어느새 주술적 가락을 띠게 된다. 구체적 삶의 형상화 속에 문득 죽음의 예감을 삽입시키기도 하고, 죽음의 음각 위에 사랑의 환희를 영사시키기도 한다. 이 주술적 가락 속에서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언어들, 예컨대 뼈·물·살·모래·돌 등은 해체된 삶의 무기미한 모습, 삶이 구극적으로 도달하는 허무의 실상, 의지와는 무관하게 형성진행하는 인간의 운명 등을 각각 상징함으로써 그의 시 자체를 영매적, 주술적인 것으로까지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도저한 허무의식과 그에 따른 윤회사상이 강은교 시의 바탕이 되고 있는 점은 분명하나, 그를 둘러싼 세계의 구석구석,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의 삶 하나하나에도 시선을 돌림으로써 시인의 보다 적극적이고 심층적인 세계인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시집 『빈자일기』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싶다.
마력의 시인, 주술의 시인 강은교!
강은교, 그는 마력의 시인이요, 주술의 시인이다. 초기의 관념적 허무의식을 영매적, 주술적 가락을 통해 이웃의 설움을 함께 서러워하고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실천적 삶의 인식으로 확장시킨 강은교 시의 변모를 뚜렷이 살펴볼 수 있는 강은교 시인의 세번째 시집 『빈자일기』는 허무의 심연에서 음영을 드리우며 솟구치는 귀기와 영매의 시혼을 너무나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