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움과 아름다움이 서늘하게 교차하는 소설, 구효서의 신작장편 출간
독자의 사랑을 받는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함으로써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고 있는 구효서의 신작장편 『남자의 서쪽』이 출간되었다.
베트남의 낯선 풍경을 배경으로 남자에게 불어닥친 갑작스런 유혹을 차분하고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는 『남자의 서쪽』은 무서움과 아름다움이 서늘하게 교차하는 소설이다.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가슴에 자스민꽃이 새겨진 흰 아오자이를 입고 수줍게 호객하는 곳, 통킹만의 노을과 분화구의 깊고 푸른 물빛, 바다의 숲처럼 펼쳐진 3천여 개의 영롱한 섬들, 까트린느 드뉘브의 아름다운 영화 <인도차이나>가 촬영된 곳인 하롱베이, 그 아름다운 베트남의 바닷가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한 사내가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를 꿈꾼다. 사회적 통념과 관습으로부터, 알게모르게 주입된 일상적 가치와 억압으로부터, 일·가족·사랑이라는 것으로부터의 탈출의 유혹이 베트남의 바다에서 몰아쳐온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지독한 그리움이 40대 남자의 생을 강타하고 몸 속 깊은 곳을 가로지르고 있던 독약 같은 욕망이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켜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의 덫으로 이끈다. 잔잔한 일상의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며 무섭고도 아름다운 주술과 신화의 세계로 빨려들게 하는 장편소설 『남자의 서쪽』은 불가해한 운명과 삶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40대 남성의 선명한 내면 기록이다.
독약 같은 연애의 유혹에 이끌리는 40대 남성의 선명한 내면기록
가정과 직장으로부터 온갖 스트레스가 덮쳐오고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무작정 벗어나고 싶은 유혹에 이끌리는 나이인 40대, 장편 『남자의 서쪽』은 바로 그 40대 보통남자의 이야기이다. 노크도 없이 불현듯 찾아와 기존의 삶의 질서를 흩뜨려놓는 불가해한 운명과 조우하게 되는 40대 남성이 겪는 미혼여성과의 연애가 이야기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
소설은 베트남 출장길에서 하노이 북동쪽 통킹만에 머물고 있는 한국 출신의 사내를 만난 경험이 있는 1인칭 화자 박재준이 어느날부터 그에게 편지를 쓰게 되면서 시작된다. 아내와 아이와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온 나는 어느날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여직원 허경주를 만나면서부터 그 사내가 떠올랐다. 그녀는 흰빛의 얼굴에 우수의 기운과 서늘한 아름다움을 가진 서른두 살의 미혼녀이다. 그녀와 사내 둘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 따위는 없지만 그녀의 프로포즈를 받게 되면서 어떤 전조처럼 그 사내가 떠오른 것이다. "부장님 넥타이엔 항상 보조개가 있어요."라는 말로 불쑥 다가온 그녀는 나의 신상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곧 그녀와 나는 서로 관계를 맺으며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녀는 내가 기억상실증으로 잃어버렸던 유년에 대하여 알고 싶어한다. 그녀와의 한없이 편하고 자유스러운 관계가 지속되면서 나의 생활은 크게 변하기 시작한다.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고 힘겹게 여겨지며 아내에 대한 짜증과 삶의 부자유스러움이 증가하고 자신을 규제하는 사회적 규범이나 규제에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녀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생긴 그 증후들은 베트남의 사내를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그 사내 아버지의 붉은산에 얽힌 운명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몽환적인 비밀이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붉은산의 저주-불가해한 운명의 덫
나는 그 사내와 베트남의 절해고도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이상스런 대화를 나누고 그에게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전면적인 결속감을 느끼며 그의 얘기에 빨려든다. 게으른 눈빛의 그 베트남 사내는 자신이 살았던 한국 어딘가의 붉은산에 대하여 신비스럽고도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붉은신장이라는 무서운 재앙을 내리는 저주의 땅인 붉은산, 사내의 아버지가 그 붉은산의 저주에 걸려 방탕한 행악을 일삼고 세상과 가족을 학대하다가 삶을 끈을 놓아버렸다는 얘기. 그후 사내는 그곳을 떠나 베트남에 왔고, 베트남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를 꿈꾸며 죽음과 맞대결한다. 나는 사내의 얘기로부터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에 대한 실마리를 얻고, 붉은신장에 걸리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사랑에 빠져버린 자신의 현상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붉은산의 속살에 유혹당함으로써 현실을 놓쳐버린 사내의 아버지, 그 유혹에 마취되지 않기 위하여 도망쳐나와 먼 아프리카를 꿈꾸며 죽어가는 사내, 단란한 가정의 행복을 지켜내지 못하고 유랑의 유혹 속으로 빠져가는 나, 상실한 기억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돼 임신과 하녀의 운명에 유혹당하는 허경주. 소설『남자의 서쪽』은 불가해한 운명의 덫이 그들 모두에게 전이돼 일상 너머에 일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 있음을 암시한다. 섬처럼 일상의 심연에 깊숙이 잠복해 있던 어떤 욕망이 거대한 지각변동에 의해 솟구쳐 일어서며 존재의 파멸에 이르고 싶은 유혹에 이끌리도록 하는 것이다. 소설은 막연한 무엇에 이끌려 또 하나의 파멸을 예비하면서 내가 돈을 인출하는 것으로 끝난다. "죽음에 이르지 않더라도 누군가와의 갈등이 아니더라도 세상과는 얼마든지 작별을 고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기며.
삶의 무서운 신비와 존재의 양면성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수작
장편 『남자의 서쪽』은 과거와 현재, 한국과 베트남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흥미롭고 탄탄한 이야기 구조와 함께 무섭고도 아름다운 주술의 세계로 읽는이를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닌 소설이다. 영혼을 뒤집어놓을 듯 강렬한 색채를 지니고 있지만 봄철 한때는 울음이 쏟아질 만큼 아름답고 찬란한 꽃이 피는 배밭을 품에 안고 있는 붉은산의 이미지는 주술을 넘어 신화의 차원으로까지 옮아가고 있다. 그 신화적 이미지는 불가해한 운명과 삶의 관계에 대한 비밀을 시(詩)적인 통찰력으로 풀어가는 작가 구효서의 탁월한 감각이 빚어낸 선명하고 아름다운 영상이다.
일 년에 일 센티미터씩 융기를 한다는 하롱베이의 섬처럼 우리들 내면에 알게모르게 도사리고 있는 무정형의 욕망이 조금씩 솟구쳐 일어서는 삶의 무서운 신비를 음화처럼 펼쳐보이고 있는 장편소설 『남자의 서쪽』은 온갖 사회적 억압과 일상의 구속에 갇혀 사는 중년의 남자가 의식적인 거부에도 불구하고 연애의 유혹에 자력처럼 이끌리는 존재의 내면이 처한 양면성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수작이다.
구효서 씨는 1957년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마디」가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4년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작품집『노을은 다시 뜨는가』『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깡통따개가 없는 마을』과 장편소설『늪을 건너는 법』『낯선 여름』『라디오 라디오』『비밀의 문』등이 있다.
1가 31-9 전화 82 2 765 6510/2, 82 2 743 2036 팩스 82 2 743 2037
http://www.munhak.com에서 제공되는 모든 데이터는 의 서면에 의한 허락 없이 어떠한 형태로도 재사용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