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밀물 앞에 쌓아올린 언어의 방파제
우리 시대의 대표적 시인 오규원(吳圭原) 씨의 산문집 "가슴이 붉은 딱새"가 출간되었다.
지난 90년 폐쇄성 폐질환의 진단을 받은 그는 요양을 위해 서울을 떠나 강원도 인제에 잠깐 머물다가 산골마을인 영월군 수주 면 무릉리의 강변 외딴집에 칩거했다. 그곳에서 그는 93년부터 96년 4월까지 4년 동안 머무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일련의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무릉日記라는 부제가 붙은 산문집 "가슴이 붉은 딱새"가 태어나게 되었다. 이런 태동 배경이 말 해주듯 "가슴이 붉은 딱새"는 가볍고 자잘한 일상의 나열이나 상념의 기록에 머무는 것이 보통인 일반적인 산문집과는 다른 의 미와 가치를 함유하고 있는, 순도 높은 언어의 결정체이다. 이 산문집은 조용히 침식해 들어오는 시간의 밀물 앞에서 시인이 쌓 아올린 언어의 방파제라 할 수 있다. 죽음의 그림자를 응시하며 시인이 빚어내는 명상과 관조의 언어엔 서구의 한 지성이 수정 의 메아리라 불렀던 투명한 울림이 가득 차 있다. 그 울림에 귀를 귀울이면 삶의 신비가 세계의 처녀성과 어울리는 순간의 눈부 신 섬광을 목격하게 된다.
수정의 메아리가 울려퍼지는 영혼의 깊은 공간
서산(西山)을 넘으면 도원(桃源)이라는 마을로 이어지는 곳이라는 무릉(武陵), 그 마을 옆으로는 주천(酒泉)이라는 이름 의 강이 흐르고 있다. 지명 자체가 고도의 상징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이곳에서 그는 산과 하늘을 바라보며 세상과 나눈 대화를 일기형식으로 풀어냈다. 따라서 이 책에 실린 산문들은 그야말로 자연과 인문과학, 종교와 예술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유의 비상을 보여주며 수정의 메아리가 울려퍼지는 영혼의 깊은 공간을 열어 보인다. 질환이 더불고 찾아오는 불편한 호흡을 이기 고 쓴 산문들을 모은 이 에세이집은 주위의 수려한 자연 풍광에 대한 정밀한 묘사와 함께 불교 경전과 현대 문학 그리고 장욱진 이나 세잔느 같은 화가의 그림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시인이 도달한 정신의 정점을 투명한 언어로 드러내보이고 있다.
총 14편의 산문으로 구성된 이 산문집에서 각각의 글은 "조주록"(장경각, 불기2535)에서 뽑은 선문답을 에피그램으로 인용하 고 있다. 거기에 그의 사유가 넘나드는 "소" "밤과 노인" 같은 화가 장욱진의 그림들, "생트 빅트와르 산" "목욕하는 여인들" 등 세잔느의 그림들, 그리고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전시 도록(圖錄)에서 뽑은 "캠벨 수프 깡통"까지 여러 그림들이 자연과 예술 에 대한 명상의 글과 함께 운치를 더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오규원 시인이 직접 찍은 풍경사진들이다. 하늘을 가린 앙상한 나 뭇가지, 안개에 뒤덮인 산등성이의 부드러운 곡선, 지상(地上)에 쌓인다기보다 그 투명한 빛으로 지상을 표현하고 있는 웅혼한 설경(雪景) 등 자연의 비범한 풍경들을 시적 감수성의 앵글로 포착해낸 그의 사진들은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운 합일을 꿈꾸는 무릉의 이상을 구현하고 있는 듯하다.
존재 그 자체!의 드러냄으로서의 풍경의 의식
"가슴이 붉은 딱새"에는 대문 옆에 핀 채송화, 뜰에 핀 달맞이꽃, 마당에 놀러온 새떼, 까치, 조팝나무, 햇빛....., 등 우리 에게 친숙한 사물과 자연 풍경이 많이 나온다. 그 작은 것들 속에서 시인은 무한한 우주의 장엄함을 읽어내고 시간 속에 생멸하 는 존재의 하염없음을 포착해낸다. 작은 것들은 무한히 확장하여 우주를 가득 채우고 큰 것들은 무한히 축소되어 미소한 것 속에 담긴다. 사변적이고 현란한 수사(修辭)를 제거하고 관념이 아닌 살아 있는(生) 언어로 사물의 본질과 존재의 가장 깊은 속내 를 탐색하는 그의 글들은 언어와 세계에 관한 철학적 탐구로 이어지며 인문적 지성의 결정체를 이룬다.
이 산문집에 수록된 글 중에 가장 장문인 "장욱진의 나무-무릉日記(9)"와 "풍경의 의식-무릉日記(04)"를 보면 그가 지향하는, 자연 속에 존재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호흡하는 순간의 황홀이 곧 그림이며 시쓰기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풍경의 의식이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는 그것은 인간이 아닌, 사물과 일치해 있는 풍경으로서의 의식이다. 풍경은 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사유 하고 있는 것이며, 그 자신 역시 풍경의 의식이기를 희망한다. 인간이 배제된 세잔느의 풍경화가 그러하듯이. 이는 사변성과 사 진적(기록적) 사실성을 지워버린 사실(reality)의 세계이며 그냥 있는 세계의 내밀한 깊이이다. 풍경의 의식으로 가득 찬 풍경 화, 정물의 의식으로 가득 찬 정물화, 초상의 의식으로 가득 찬 초상화를 통해 그는 단순한 재현의 세계가 아닌, 존재 그 자체! 를 구현하고자 하는 듯하다.
혼신의 힘과 명철한 정신으로 쓴 고행의 書이자 명상의 書
오규원 시인은 "책 끝에-무릉을 떠나며"에서 "나는 시간을 지배하지 않고, 시간을 살고자 했다"라고 쓰고 있다. " 가슴이 붉은 딱새"는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어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건 시인이 혼신의 힘과 명철한 정신으로 쓴 고행과 명상 의 글모음집이다. 시인의 상상력이 인문적 지성과 어울려 섬세하고 명징하게 빚어내는, 삶과 세상과 존재의 깊은 곳을 감동적으 로 파고드는 이 시대의 빼어난 산문의 보고(寶庫)-"가슴이 붉은 딱새"는 영혼을 흔드는 긴 침묵으로 우리를 이끄는, 서늘하고 아 름다운 에세이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