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한 폴란드 현대시의 거장, 쉼보르스카의 시집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 독점 출간!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은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시집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이 출간되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와 함께 졸속번역, 중복출간된 책들이 서점가를 메우던 예년과 달리, 지난해엔
해외저작권 계약 때문에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오고 난 뒤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 독자들이
수상작품집을 대할 수 없는 현상이 벌어졌다. 비록 지각 출간이긴 하지만 문학동네의 쉼보르스카 시집
출간은, 정식계약과 전공자의 번역을 거쳐 이루어진 것인 만큼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집 출간의
정상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적인 사랑을 간직하고 서로를 이해하도록 노력하자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절제된
시어 속에 살아 있는 시세계를 보여줌으로써 1996년 노벨문학상의 수상자로 결정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그녀는 서정적인 시어와 인간의 실존을 꿰뚫는 명징한 메시지로 폴란드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아온 여성시인이다. 폴란드의 네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기록된 그녀는 폴란드 문학의
저력을 다시 한 번 입증한 셈이 되었다.
“모짜르트처럼 잘 다듬어진 구조에 베토벤 같은 웅장함을 갖춘 시"라는 찬사를 받아온 쉼보르스카의
시들은 꾸며진 감성이나 낭만적 휴머니즘 등의 감상과는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정치비판적인
내용에서부터 인간존재의 철학적인 관조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품세계를 펼쳐왔다. 또한 시인은
일상어의 사용에 능숙하되 언어의 단편적인 나열 효과에 기대는 일 없이, 철학적 문제를 극화하는 독특한
시적 스타일을 완성시켰다. 쉼보르스카 시세계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들을 선별,수록한 시집
『모래알갱이가 있는 풍경}은 인간실존을 관통하는 냉철한 시선과 함께 시의 창조적 ‘힘’에 관한
시인의 굳건한 믿음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현대시의 모짜르트, 쉼보르스카가 들려주는 시의 광시곡
인도주의와 실존의 문제에 집중한 시세계처럼 시인 쉼보르스카의 삶 역시 드러나지 않되 진지하게 문학에
몰입하는 자세로 일관되었다.
1923년 폴란드의 중서부 쿠르닉에서 출생한 쉼보르스카는 8세 때 가족과 함께 남부도시인 크라쿠프로
이주한 후 현재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다. 크라쿠프의 야겔로니안대에서 폴란드 문학과 사회학을 공부한
쉼보르스카가 졸업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곳은 『문학과 인생』이라는 잡지의 편집부였다. 그녀는 이
잡지에 문화컬럼을 고정기고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시 창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945년 시 [나는
단어를 찾는다]로 데뷔한 후 당시 많은 폴란드 시인들이 고국의 공산화에 투항하거나 저항하는 문학을
했으나 그녀는 이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하는 순수문학인의 자세를 지켰다.
이후 첫 시집 『그래서 우리는 산다』를 발표한 1952년과 1954년 두 차례 그는 절필을 선언하게 된다.
폴란드 공산정권 수립과 함께 문학인에게 사회주의 리얼리즘 원칙이 암묵적으로 강요되던 시기에 문학을
포기함으로써 그는 조국에 순응했던 것이다.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회상을
형상화함으로써 폴란드의 나이든 세대는 물론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큰 공감을 얻어내고 있는
쉼보르스카는 지난 1981년 28년 간 일했던 잡지 『문학인생』에서 퇴직한 후 창작에만 몰두하고 있다.
깊숙한 관조의 한 조각을 베어드는 투명한 서정의 세계
폴란드 안에서만 살아온 그녀지만 작품세계는 폴란드 민족의 토속적인 향취를 그리는 데 머물지 않는다는
것과 슬라브문화권에서 자란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특유의 흐트러진 감성이나 애조띤 시색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쉼보르스카 시세계의 큰 특징으로 꼽힌다.
‘실존주의 시인’ ‘철학자 시인’이라는 애칭이 증명하듯이 그녀 시의 주된 테마는 인간소외문제와
현대문명 속에서의 인간간의 불완전한 대화, 나약한 존재로서 인간의 모습 등 주로 ‘인간의
실존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쉼보르스카에 의하면 인간은 불변의 생물학적 자연법칙과 역사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 지극히 나약한
존재일 뿐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한 소외된 존재이다. 따라서 그녀는 인간존재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간의 일회성(一回性)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우주적
차원에서 관찰하고 있다.
그녀는 또한 대부분의 폴란드 시인, 작가들과는 달리 폴란드 민족의 특수한 위치, 즉 역사적 특수성이나
체제의 속박과는 무관하게 인류보편의 문제인 인간의 본질적인 물음에 집중하고 있다. 쉼보르스카는
이데올로기 대립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인류 누구나가 가슴속에 본질적으로 간직한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집착한다. 원초적 고통 아래 놓인 인간에 대한 연대감과 동질의식, 이른바 휴머니즘의 정신이
그녀의 시세계 깊숙한 근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한순간,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시어의 무게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인생과 세계에 대한 심도 깊은 내면적 관조의 모습들로 가득찬 시집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에서는 시인이 가진 철학적 주제를 담아낼 시적 형식에 대해 독자들이 그
창작과정까지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역사 속에 나타난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는 「트로이에서의 한순간」 「히틀러의 첫번째 사진」
「베트남」 「끝과 시작」 「어떤 사람들」 등의 시에서 그녀는 인간의 본질적인 행복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사로운 일 때문에 언제나 누군가는 전쟁을 일으키고 또다른 많은 이들은 전쟁의 제물로 사라지는
것을 극적인 구성력에 힘입어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또한 전쟁의 아픔을 잊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끝과 시작」, 인간의 파렴치함과 속물근성을 비웃는 「자아비판에 대한 칭찬」과
「희희낙락」, 끝없이 계속되는 인간의 잔인성과 미움을 보여주는 「고문」 「증오」등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 대한 시인의 깊은 애정을 읽어낼 수 있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모래알갱이가 있는 풍경」을 비롯, 「과장 없이 죽음에 대해」 「경치와의
이별」 「하늘」 등에서는 선과 악, 좋고 싫음과 같은 구별이 결국 인간의 것일 뿐이라는 것, 하늘과
땅으로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은 전체를 바라보기에 적당한 사고방식이 아니라는 것, 자연에서 한발
물러나 자연을 바라볼 때 비로소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시인은 전언이 담겨 있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가장 겸손한 작가로 꼽히고 있는 쉼보르스카의 시집은 명상적, 관조적인 시어로 인간의 원초적인 고통을 차갑게 투시해내면서 한순간에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둔중한 시어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또한 외세의 침략에 힘겹게 견디어온 폴란드 문학의 다양한 저력과 깊이를 새롭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