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통일성을 갈구하는 인간의 불가능한 사냥의 이야기!
현대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엠마뉴엘 로블레스의 장편소설『순수의 사냥』이 출간되었다.
여행길에 우연히 만난 연극배우 청년과 유부녀가 사회적 통념과 계급의 장벽을 뚫고 이루어내는 사랑의 승리를 그린 이 작품은 순수성을 상징하는 신화 속의 동물 일각수(一角獸)가 말해 주듯 타락한 세계 속에서 순수의 통일성을 갈구하는 인간의 저 불가능한 사냥의 이야기이다. 순수의 사냥 저 끝에는 항상 죽음이 존재하는 법. 그러나 덫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끝내 더렵혀지지 않은 영혼을 간직하며 자유로운 사랑과 참다운 행복을 찾아가는 젊은이들 앞에 죽음조차도 그들의 갈망의 순수성을 훼손시키지는 못한다. 엠마뉴엘 로블레스는 이 젊은이들이 열정적으로 벌이는 사냥의 모험을 강렬하고 육감적인 문체와 속도감 있는 극적 전개로 펼쳐보인다. 거기에는 인간들이 자신의 운명과 대결하는 비극적 유희라는 주제가 감동적으로 육화되어 있으며 또한 스페인계 피를 물려받은 로블레스 특유의 섬세함과 비장미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엠마뉴엘 로블레스(Emmanuel Robles)는 1914년 알제리아의 오랑에서 태어났다. 한 살 위인 알베르 카뮈와 절친한 친구로 지내면서 1938년 소설『행동』을 발표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가이자 탁월한 극작가로서 그는 소설, 시, 시나리오, 희곡 등 문학 전반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왔다.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와 간결하면서도 격정적인 문장으로 높은 문학적 평가와 독자의 사랑을 함께 받은 그의 작품들은 프랑스에서는 물론 30여 개 국가에서 번역 소개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알제리아 문학대상, 포퓰리스트 상, 페미나 상, 포르티크 상 등을 수상했으며 아카데미 공쿠르 상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95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인간의 노동』『도시의 높은 곳』『새벽』『유람선 여행』『폭력의 계절』『베니스의 겨울』『폐허의 풀』, 단편집『죽음과의 대면』『그늘과 기슭』『보이지 않는 나무』, 희곡『몽세라』『11월의 성』『창』『환등기』등 다수가 있다.
우연한 만남, 불꽃 같은 하룻밤의 정사, 관능 너머의 깊고 순결한 사랑
소설은 여주인공 마들렌느 라샤뉴가 마르세이유에서 파리를 향해 눈보라치는 밤길을 달리던 중, 두 갈래길에서 아주 우연히 접어든 길가의 주유소에서 이루어진 어떤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연극 배우로 순회공연 중이었던 피에르 마르티낭쥬와의 그 만남은 여인숙에서의 불꽃 같은 하룻밤의 정사 후 마들렌느의 인생을 발칵 뒤집어놓게 된다. 부유한 골동품 상인 남편에 대하여 권태와 염증을 느끼고 있던 서른넷 살의 마들렌느는 매우 크고 빛나는 눈매를 가진 이 청년과의 사랑에 생의 에너지를 다 쏟아부으며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변신을 시도한다. 그리고 피에르는 자신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은 이 매력적인 여자의 유연하고 섬세한 지성에 매료된 채 그녀와 정념의 불꽃을 태우며 힘찬 생의 기운을 느낀다. 그들은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일상과 도덕과 관습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서로의 존재로부터 무한한 황홀감을 느끼며 관능적인 격정 이상의 보다 깊고 순결한 삶을 향해 나아간다.
순수의 사냥,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한편 피에르의 절친한 친구이자 연극계의 동료인 세르쥬 모로는 가진 것 없이 가난하기만 하지만 삶의 온갖 질곡과 어려움 속에서도 끝내 더렵혀지지 않는 영혼의 순수성을 간직한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독창적이며 특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피에르는 순수한 영혼을 지녔지만 위선과 거짓의 세계 앞에서는 분노를 터트릴 줄 아는 뜨거운 내면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의 분노가 폭발할 때는 너무도 과격하고 거칠어 걷잡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는 주위의 위협에 용이주도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거칠게 반응한다. 순수의 속성은 주도면밀하게 앞뒤를 계산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까닭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점점더 극적인 상황 속으로 밀어넣는다. 피에르와 마들렌느가 뜨거운 사랑의 품 안에서 참다운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고 있을 때 피에르는 연극「일각수 사냥」의 순회공연 및 재공연에서 자신이 제외되는 음모에 맞닥뜨리자 거세게 분노한다. 그 부당한 처사에 급기야 피에르는 인질극을 벌이게 되고 부상까지 당하게 된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에 성공한 그는 그러나 쫓기는 몸이 되어 어두운 숲속을 짐승처럼 헤매이다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 덫으로 가득찬 부당한 세계에서 순수를 지키고자 하는 젊은이의 모험,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순수의 상징 일각수를 좇는 사냥과 모험의 비극적 운명
이 책의 원제는 일각수 사냥(La Chasse a la Licorne)이다. 일각수(一角獸)는 몸은 말, 머리는 숫염소와 닮았으며 이마에 한 개의 뿔을 가진, 신화에 등장하는 환상의 동물이다. 일각수의 하나뿐인 뿔은 처녀 같은 순수성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일각수 사냥은 이 소설에서 주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는 소설 속 연극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처럼 순수성을 상징하는 일각수와 연극의 모티브가 암시하듯 소설『순수의 사냥』에는 맑고 투명한 영혼을 지니고 자유로운 사랑을 갈구하는 젊은 남녀들이 보일 듯 보일 듯 어두운 세상의 밀림 속으로 사라져가는 일각수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맨다. 엠마뉴엘 로블레스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체와 탁월한 극작가로서의 장면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젊은이들이 순수를 좇는 사냥과 모험의 비극적 운명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몽환적 에로티시즘에 감춰진 비극적 아름다움!
문학평론가 김화영 교수는 "로블레스의 작품을 읽고 나면 언제나 저 부서지기 쉬운 행복의 떨림과 위기, 그 위기 때문에 더욱 귀중해지는 삶의 빛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라고 로블레스의 작품이 지닌 잔잔하면서도 깊은 감동의 울림을 설명하고 있다. 그 감동은 아마도 로블레스 특유의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와 에로틱하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비극적인 소설의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의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인간의 알 수 없는 충동과 욕망 그리고 몽환적 에로티시즘에 감춰진 비극적 아름다움을 감각적인 문체와 암시적인 묘사로 빼어나게 묘사한 부분이다.
"곧 밤이 왔다. 또다시 옷 벗을 때 옷깃이 스치는 소리. 욕실에서 두 사람이 함께 씻기, 두 사람의 벗은 몸에 맺힌 채 촛불빛에 진주처럼 빛나는 물방울, 열에 들뜬 듯이 속삭이는 말들, 처음에는 나른함으로 가득 찬 애무, 그리고는 뜨겁게 솟구쳐오르는 욕망."
"(......) 벗은 몸으로 시트 속으로 들어가서 그 여자는 옆으로 누워 잠자고 있는 마르티낭쥬에게 다가가서 그의 어깨에다가 이마를 꼭 붙이고 그의 피부 냄새를 맡았다. 사랑이란 어떤 경우나 그 사랑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을 동반하는 법이다. 줄기차게 으르렁대는 저 폭풍우, 마치 이 우주 전체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고 넌지시 일러주듯 위험신호를 보내며 으르렁거리는 저 폭풍우 소리까지 가세하는 가운데 그 공포감은 그녀의 마음속으로 밀려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