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사유와 삶의 심연을 꿰뚫는 매혹적인 힘이 넘치는 최인석의 네번째 창작집
희곡 작가, 시나리오 작가 등 여러 장르에서의 다채로운 활동만큼이나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문단에서 가장 개성적이고 정력적인 작가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아온 작가 최인석의 네번째 창작집 『나를 사랑한 폐인(廢人)』이 출간되었다.
올해로 문단 경력 16년이 넘은 그는 젊고 활력 넘치는 작가정신뿐만 아니라 집요하고 강인한 작가적 의지의 소유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우리 소설의 가볍고 사적이며 내면 지향적인 90년대적 유행에 편승하지 않으면서 진지하고 묵직한 주제를 고집하는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문학의 본령에 충실한 독자적 성취”(한겨레 신문)를 거두어왔다.
그의 소설은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세계 인식을 주조로 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속되고 타락한 세계에서 인간의 현실적인 구원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의식이 가로놓여 있다. 네번째 소설집에 해당하는 『나를 사랑한 폐인(廢人)』은 그와 같은 ‘최인석적인’ 장점이 유감없이 드러난 네 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최인석적인’ 장점이란 바로 비극적인 사유와 삶의 심연을 꿰뚫는 매혹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는바, 그러한 장점을 뚜렷이 그리고 온전히 담고 있는 이번 소설집이야말로 최인석의 소설 여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화제의 작품집이다.
어둡고 난폭한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파멸적이고 광기 어린 사랑
『나를 사랑한 폐인(廢人)』에 수록된 네 편의 작품은 자전적인 소설 「소설가 최보(崔甫)의 어제, 또 어제」를 제외하고는 세 편의 중편이 철저히 구체적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현실의 미세한 굴곡을 예민하게 포착해내는가 하면 알레고리적 상상력으로 허위로 가득 찬 현실을 깊숙이 도려내기도 한다. 자칫 무거워 부담스러울 수 있는 주제를 최인석은 특유의 상상력과 생생한 묘사로 생동감을 살리고 있다. 때문에 그의 소설에는 매 작품 팽팽한 긴장감과 열기가 넘쳐난다.
표제작 「나를 사랑한 폐인(廢人)」은 동해안의 작은 포구 거진 근처의 외딴 언덕에 바다를 향해 자리잡은 낡은 한옥의 카페 ‘귀허(歸墟)’가 무대이다. 그 카페에서는 세상을 삼켜버릴 듯이 무섭게 요동치는 어두운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여기에 두 인물이 등장한다. 시인 지망생이었으나 거짓 기사나 꾸며대는 여성지 기자로 전락해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 세상에 극도의 염증을 느끼며 귀허로 도피한 동찬이라는 남자와 카페 귀허의 주인여자 정순이 그들이다. 그녀는 착한 사람을 제물로 삼는 세상의 악의에 인생을 망친 여성이다. 그들은 서로의 슬픈 처지에 공감하면서 벼랑 끝 같은 사랑을 시작한다. 어둡고 난폭한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파멸적 사랑! 동찬은 정순의 슬픔을 통해 얻는 위안에 이끌려, 귀허에 그대로 남아서 폐인처럼 살아도 좋으리라 생각하고 자멸의 욕망에 이끌린다.
폭력적이고 오염된 세상에서의 낙원에 대한 간절한 희원
「나를 사랑한 폐인(廢人)」은 동찬이 토해내는 자학의 언어와 자멸의 광기에 의해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닫지만, 궁극적으로는 지옥 같은 세상에서 낙원을 꿈꾸는,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타락한 세계와 낙원과의 대립 구조를 통한 최인석의 유토피아 의식은 「지리산에 저 바다」에서도 확인된다. 이 작품에서도 대조적인 두 세계가 등장한다. 그것은 지상적 삶의 환락성을 상징하는 성우라는 인물과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로 등장하는 만덕이라는 인물로 대표된다. 성우는 아이를 잃고 아내마저 집을 나간 후 다니던 공장도 그만두고 부랑자 생활을 하다 감옥까지 다녀온 인물이고, 반면 만덕은 어렸을 때부터 지리산 속에서 자란 인물로 공사장의 동료 인부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할 만큼 순수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발적인 살인 사건이 이 작품의 주요 줄거리를 이룬다.
최인석의 유토피아적인 사고를 보여주는 위의 두 작품은 여러 모로 유사하다. 대조적인 두 인물의 대립이 그렇고, 속되고 타락한 현실의 공간(귀허 밖의 인간세상「나를 사랑한 폐인(廢人)」 / 공사장「지리산 저 바다」)과 현실 초월적 공간(‘바다 너머’「나를 사랑한 폐인(廢人)」 / ‘구름바다 너머’「지리산 저 바다」)의 대립이 그렇다. 이 두 작품을 통해 최인석이 표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 의식은 폭력적이고 오염된 세상에서 “이곳과는 다른 세상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다. 작중인물들이 격렬하게 토해내는 일탈적이고 파괴적인 삶의 충동은, 언어와 진실이 분열되지 않은, 삶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는 진정성의 세계에 대한 희원(希願)인 것이다.
세기말의 심연에서 솟구쳐오르는 서사의 마력!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인 미국의 뉴욕을 배경으로 현실 정치의 부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현실의 타락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 가하는 폭력을 묘사한 중편 「약속의 숲」은 최인석의 또하나의 대표작이라 할 만큼 빼어난 작품이다. 그리고 최인석의 작가정신과 독특한 ‘시간 의식’을 알레고리적 상상력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자전적인 소설 「소설가 최보(崔甫)의 어제, 또 어제」도 소설가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최인석의 네번째 소설집 『나를 사랑한 폐인(廢人)』은 광기와 퇴폐로 오염된 우리 시대의 우울한 초상화이지만, 문학평론가 서영채가 “심연의 힘”이라고 최인석의 소설적 매력을 정확히 지적하였듯이, 그의 소설은 폭력와 타락으로 얼룩진 속된 세상에서 유토피아를 동경하는 순정한 영혼의 세계로 뻗쳐 있으며, 그럼으로써 세기말의 심연에서 솟구쳐오르는 서사의 마력을 물씬 풍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