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등단한 이후 총 13권의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발표하며, 오직 ‘쓴다’라는 동사로만 존재해온 작가, 김연수. 다채로운 그의 소설세계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편이 있다. 작가 스스로 밝히듯, ‘팬들을 위해 쓴 특별판 소설’인 『사랑이라니, 선영아』가 그것이다. 그는 “잠시 쉬었다 가는 기분”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덧붙이는데, 한 편의 소설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에 걸친 취재와 관련 자료를 샅샅이 탐독하는 그의 작업 스타일에 비추어 볼 때, 김연수의 이 말은 작법이 아닌 어떤 마음 상태와 관련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짧은 소설을 쓰기 위해 그는 그답게 ‘사랑’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하나하나 살폈고, 다만 이전과 달리 좀더 경쾌하고 산뜻한 기분으로 이 작품을 썼다고 말이다.
여전한 우리의 화두, 사랑!
위트 넘치는 비유와 풍부한 패러디로 가득한, 김연수식 사랑에 대한 모든 것
김연수가 말하는 특별판 소설에는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문장 자체를 체화한 듯한, 변함없는 사랑은 존재하며 그것은 결혼으로 완성된다 믿는 광수. 이에 ‘아니, 사랑이라니’라고 반문하며 낭만적 사랑이란 자본주의사회의 공산품일 뿐이라 여기는 그의 대학 동창 진우. 그리고 영혼의 질이 이렇게나 다른 둘 사이의 유일한 교집합인 선영. 선영이 진우와 사귀기 전부터 13년 동안 그녀만을 짝사랑해오다 마침내 그녀와 결혼하게 된 광수이니, 그의 평소 지론대로라면 그의 사랑은 결혼과 함께 완성되었고, 이후의 시간이란 그 사랑이 어떠한 흔들림 없이 지속되는 삶일 것이다. 하지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완전했던 선영에 대한 그의 사랑은 결혼식 당일에 생겨난 사소한 균열을 계기로 이후 서서히 갈라져버리게 된다. 반면, 과거 사랑했던 여자란 단지 ‘Y염색체가 결여된 인간’일 뿐이라 여기는 진우 앞에 오래전 연인인 선영이 광수의 아내가 되어 등장할 때, 그의 입에서는 그가 그렇게나 부정했던 ‘사랑’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그야말로 “참 내, 내가 왜 이러지?”의 상태가 되는 것, 자신에게는 있는 줄도 몰랐던 어떤 면면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 김연수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만 ‘진실로 연애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 삼차방정식 그래프를 그리는 일이나 주기율표를 작성하는 일은 곧 까먹겠지만, “사랑해”라고 말한 경험은 영영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67~68쪽)
사랑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쫀쫀한’ 인간인지, 혹은 얼마나 ‘얼멍얼멍한’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재질문하며 사랑의 본질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는 한편, 그 배면으로는 대중문화 기호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패러디를 깔아놓아 김연수식 사랑학개론에 풍부함과 유쾌함을 더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명대사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부터 “문학도 모르는 것들이 잘난 척하기는”이라는 한 개그 프로그램 속 캐릭터의 유행어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인물들의 목소리로 화해 생기 있게 발설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이 소설을 ‘어휘용례사전’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작품 안에는, ‘고자누룩하다’ ‘아령칙하다’ ‘찌물쿠다’ 등 신선한 어휘들이 등장해 소설에 실감을 불어넣는다.
이 짧은 소설에서도 김연수는 그답게 진지함과 유쾌함 사이를, 익숙한 것과 전혀 새로운 것 사이를, 통통 튀는 걸음으로 발빠르게 옮겨다니며 그만의 지적인 사랑론 하나를 펼쳐 보인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기 위해 이 소설을 펼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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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는 아무리 어려운 얘기를 해도 ‘소설적’으로 한다. 이번 소설의 경우 다소 해학적이면서도 따뜻한 웃음이 광수와 진우의 현학과 지리멸렬함을 감싸 숨긴다. 그리하여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재미있고 지적인 ‘사랑론’ 하나를 소설로 만들어놓는다. (…) 김연수는 이제는 다소 촌스러워진 엄숙성, 결벽성, 계몽주의에 대해 부채감을 느끼지 않는 작가이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이 그의 소설에 웃음과 진지함, 아날로그 글쓰기와 디지털 글쓰기, 좌뇌와 우뇌가 어느 하나에 폭력적으로 통합됨 없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풍경이 연출될 수 있도록 해준다.
_김형중(문학평론가, 조선대 국문과 교수)
■ 본문에서
왜 우리는 사랑을 ‘맺거나’ 사랑을 ‘이루지’ 않고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그건 사랑이란 두 사람이 채워넣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집어넣어도 그 관계는 채워지지 않는다.(45쪽)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 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47쪽)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이다. 우리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혼신의 힘을 바쳐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가 모르는 부분은 영영 남게 된다.(89쪽)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105쪽)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네. 그 사실이 얼마나 아쉬운 것인지, 그러면서도 그게 또 얼마나 마음 편하게 하는 것인지,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며 광수는 뼈아프게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자라나 어른이 된다지만, 어른들은 자라나 무엇이 될까?(119쪽)
■ 차례
사랑이라니, 선영아 _007
해설_김형중(문학평론가)
형상기억 브래지어를 벗어던지다 _135
작가의 말 _152
■ 김연수 │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으로 2001년 동서문학상을,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2003년 동인문학상을,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2005년 대산문학상을, 단편소설 「달로 간 코미디언」으로 2007년 황순원문학상을, 단편소설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으로 2009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장편소설 『7번국도 Revisited』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원더보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소설집 『스무 살』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여행할 권리』 『우리가 보낸 순간』 『지지 않는다는 말』 『소설가의 일』 『대책 없이 해피엔딩』(공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