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문장을 마쳤을 때에는 오직 나만이 영원했단다.”
끝없이 일렁이며 흘러가는 문장들,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기억의 빛과 울림.
신인 작가 이상우 첫 소설집 『프리즘』 출간
해석을 무력화시키는 경이로운 매력으로 한국문학에 낯선 활력을 가져온 작가 이상우의 첫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이상우는 2011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중추완월」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주는 불편한 매력에 대해 지적하며, “이미지로 읽는 이의 감관을 자극하여 매혹으로 이끄는” 작가,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이미 포로가 되었음을 당혹스럽게 시인하게 만드는” 작품, 그 계보 아래 「중추완월」이 놓여 있다(문학평론가 차미령)고 평가했다. 또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통해 “인물의 심정에 대해 일일이 말하는 것보다 어떤 이미지를 장악하는 것이 문학적으로 상수(上手)에 속하는 것이라면 이 작품은 상수 중의 상수”(문학평론가 황종연)라고 평가받았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분분한 해석과 마니아들의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켜온 작가 이상우는 또래의 젊은 작가들―젊은 세대의 존재론적 특징을 문체로 구현하며 이미 독특한 소설세계를 구축한 소설가 박솔뫼, 최근 첫 소설집 『의인법』(현대문학)을 출간하며 특유의 헐거운 듯 보이는 매력적인 서사로 도리어 풍부한 설득력을 보여주고 있는 오한기, 「건축이냐 혁명이냐」로 2015년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하며 한국 소설문학의 새로운 출발을 알린 정지돈 등―과 함께 ‘후장사실주의’ 그룹을 결성 · 활동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등장하는 “내장사실주의”를 패러디한 것으로 보이는 이 그룹은 통일된 이념이나 공유하는 철학은 존재하지 않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내밀한 문학적 교류를 지속해가며 서로의 창작 동력이 되고 있으며, 얼마 전 개성적인 문예지 『analrealism vol.1』(서울생활)을 펴내기도 했다.
현재 한국문학에서 가장 문제적인 작가의 첫 소설집 『프리즘』은 등단 이후 2015년 현재까지 발표된 여덟 편의 작품들을 발표 순서대로 배열하여 독자들이 그 소설세계의 역동적인 변화를 짐작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끝없이 일렁이며 흘러가는 문장들은 동일하지 않은 시공간을 한데 겹쳐놓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 속에서 새어나오는 빛과 울림을 고스란히 감각하게끔 만든다. 첫 소설집을 통해 이러한 소설세계의 개성이 어디서 출발하였으며 또 현재 어떻게 진행중인지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첫머리에 놓인 「중추완월」 은 문학동네신인상 수상작으로 기억과 후각을 강제적으로 잃은 탓에 무감하게 암흑가의 시체를 처리하며 살아가는 남자 ‘위’의 이야기를 다룬다. 시적인 문장들이 곳곳에서 돌출하는 매혹적인 누아르(noir)로, 심사위원이었던 문학평론가 차미령은 “다음 작품을 읽고 싶다. 비정한 스타일 아래를 관류하고 있는 이 도저한 공허가 무엇으로부터 연원하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한 신인 작가가 그려놓은 나쁜 꿈의 파편에서 이 세대 이야기의 피와 뼈를 발굴하게 될는지도 모른다”고 평했다.
다음 작품인 「비치」는 이모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브라질에 간 한 영화배우의 이야기로, 사람들을 끌고 다니는 개처럼 보이는 긴 그림자, 영혼의 길잡이인 것처럼 부표가 떠 있는 맑고 따뜻한 해변, 맨얼굴을 덮어주는 기이한 가면들…… 등 작가가 천연덕스럽게 펼쳐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 안에 특유의 말놀이 솜씨가 빛을 발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중추완월」과 함께 장르적인 매력을 발휘하고 있는 「객잔」은 여인의 몸에 그림을 그리는 ‘나’, 시를 쓰는 ‘규보’, 외팔이 ‘과’, 그가 떠난 뒤 나타난 ‘용이’ 등 객잔에 든 인물들의 꿈과 기억을 무협서사 형식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안개가 자욱이 깔린 길을 걸어 객잔에 드는 순간, 색채가 사라지고 흑백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단문으로 구성된 짧은 문단, 그 문단들 사이의 간격은 이 작품을 마치 한 편의 시처럼 보이게 만들어 긴 여운을 남긴다.
이상우를 가장 널리 알린 「888」 은 8비트의 사운드에 몸을 맡긴 채 춤을 이어나가는 소설 속 인물처럼 읽는 내내 나른하고도 몽롱한 기분이 들게끔 만든다. 주체가 모호한 문장, 그러한 문장들의 배치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장면, 또한 그러한 장면들의 연속이 가져오는 감각적인 리듬 등 이상우 소설의 개성을 명징하게 보여주기 시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888’이라는 제목의 시각적 이미지, 즉 여섯 개의 원들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느낌을 주는 이 작품에 대해, 문학평론가 강동호는 “소설에 대한 사람들의 통념을 도발하겠다는 실험의식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되는”(문지 블로그, 2014년 5월 ‘이달의 소설’ 인터뷰 중) 무심한 “도발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2015년 젊은작가상 본심에 오른 「추리 추리 하지 마 걸」은 생물학자인 남자와 종군기자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목테수마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묵시록적 세계를 그려 보인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소설가 정영문은 “‘문학은 수법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이 작가가 앞으로 세련되고 능란한 수법을 구사해 이상하면서도 놀라운 작품들을 쓰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평했다.
그다음으로 표제작과 함께 이상우의 소설적 지향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작품 「나방, 평행」이 이어진다. 정지돈은 해설(「우리가 미래다―금정연과 이상우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다」)에서 “과연 우리의 위상동형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과거와 나의 미래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이상우 소설의 비밀을 밝히는 중요한 질문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들은 그 열쇠가 되어주는 것처럼 읽힌다. “아내가 없는데, 아내를 잃고, 딸이 없는데, 딸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내가 나를 지나간다. 시간은 자아의 환영이고, 나는 날갯짓한다. 영원보다 새로울 평행을 시늉하며.”
「벨보이의 햄버거에 손대지 마라」는 벨보이, 거리의 기타리스트 첸, 거렁뱅이 켄, 버드맨, 트럭 운전수 재키 등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서사의 거침없는 활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특유의 혼종적인 스타일이 또다른 잠재성을 폭발시키는 소설이다. 소설 속의 시점과 인물들은 혼란스럽게 교차하며 “창 안으로 간극이 쏟아졌다”와 같은 느닷없는 시적인 문장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닥친다”고 평했다.
「프리즘」은 이상우의 가장 최신작으로, 속이 비치는 투명한 종이들을 한자리에 겹쳐놓았을 때 보이는 풍경을 담아낸 듯한 작품이다. 한 계절에 발표된 모든 단편소설들을 검토하고 그중 문제적인 작품들을 뽑아 논하는 계간 『문학동네』의 리뷰 좌담 코너에서 이 작품은 “이를 소설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하에 활발하게 논의된 바 있다. 그중 문학평론가 이재경은 “마치 여러 자의식들이 벌이는 감각, 인상들의 인터플레이를 듣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고백하며 이 작품의 독특한 매력을 지적했다.
이상우는 현재 한국 문학에서 반드시 짚어지고 풀려야 할 비밀과도 같은 작가이다. 그가 쓰는 문장은 읽는 즉시 이해되고 이 때문에 소비될 운명에 처하는 문장의 길을 가지 않는다. 이해되지는 않지만 감각되는 기이한 문장들, 이것을 이상우 소설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첫 소설집을 통해 그 비밀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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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은 이상우가 산책하는 이야기인데 그는 서울을 걸을 때 시공을 초월한다. 그건 그의 산책이 기억과 감정, 풍경과 사람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글이 음악적이고 그의 글에 리듬이 있다면 그건 문체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은 리듬이 언어에서 오는 것인 줄 안다. 문학에서 리듬은 충돌에서 온다. 충돌은 이상우가 나열하는 기억과 풍경의 리듬이다. (…) 이상우의 기억에는 일반적인 분류나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환상과 사실, 기억과 미래, 여기와 저기의 구분이 없다. _정지돈(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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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에서
─형. 비극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시오?
과가 물었다.
─글쎄.
─무엇인가를 이해했다, 라 착각하는 순간에 다가온다는 것이오.
벽은 호젓했다.(「객잔」, 74쪽)
리듬. 너는 리듬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고, 소름. 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고, 문레스, 또는 마더레스.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고, 춤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너는 혼자 춤을 춘다.(「888」, 97쪽)
한 겹, 한 겹, 부드럽게, 본질을, 더 나아가 허공의 비어 있음이라는 의미마저 벗겨내듯이. 벨보이는 의자에 앉아 햄버거 포장지를 벗겨보았다.(「벨보이의 햄버거에 손대지 마라」, 246쪽)
어느 한 문장을 마쳤을 때에는 오직 나만이 영원했단다. 구원은 개인적일 수 없어요, 아버지. 처음 보는 남자와 헤어져 고궁을 나오니, 복원가들은 어두워져 있고 그들 등뒤로 밀려나가는 빛이 조각내는 영역의 일부에서 어머니가 치마를 너풀거리며 멀어졌다.(「프리즘」, 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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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발표 지면
중추완월 …………… 『문학동네』 2011년 가을
비치 …………… 『문학동네』 2012년 여름
객잔 …………… 문장 웹진 2012년 6월
888 …………… 웹진 한판 2014년 3월
추리 추리 하지 마 걸 …………… 『문예중앙』 2014년 여름
나방, 평행 …………… 『세계의문학』 2014년 가을
벨보이의 햄버거에 손대지 마라 …………… 『21세기문학』 2014년 겨울
프리즘 …………… 『문학과사회』 2015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