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단의 가장 공신력 있는 장편소설의 산실 ‘문학동네소설상’의 제21회 수상작 『소각의 여왕』이 출간되었다. 무려 삼 년 만의 수상작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날카로운 통찰력과 섬세한 문장으로 사랑받는 은희경의 『새의 선물』, 에너지 넘치는 서사를 통해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보인 천명관의 『고래』, 신선하고도 불온한 상상력을 뿜어냈던 김언수의 『캐비닛』, 그리고 ‘특촬물’이라는 생소한 제재를 통해 현 젊은 세대의 내면 풍경을 탁월하게 그려낸 이영훈의 『체인지킹의 후예』까지, 언제나 문학의 최전선에서 세계와 인간을 향한 날카롭고도 깊이 있는 시선을 보여주었던 전통이 올해에도 어김없이 이어진다. 이유의 『소각의 여왕』은 고물상을 운영하는 지창씨와 유품정리사인 그의 딸 해미, 두 부녀의 이야기이다. 누군가 쓸모없어 함부로 버린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생계를 잇는 소중한 수단이 되고 또 그렇게 모여진 것들은 분류작업을 거쳐 쓸모 있는 것들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 순환과정 안에는 비참한 세계에 기거하는 부녀의 일상, 그들이 꾸는 꿈의 다소 허황된 속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텅 빈 꿈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텨갈 수밖에 없는 산다는 일의 슬픔이 비친다.
고물상 주인 지창씨와 유품정리사 해미가
쓸모없어진 것들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속살
재수생인 해미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1톤 포터를 몰고 다니며 고물상을 운영하는 아버지 지창씨의 일손을 돕는다. 지창씨의 고물상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두 부자는 대를 이어서 반짝이는 보물이라도 되는 양 낡고 쓸모없는 고물을 소중히 다룬다. 해미는 골목마다 자신을 마중하는 듯한 모습으로 나와 있는 폐지와 고물들을 수거하고, 그것들을 동일한 속성을 가진 재료로 분해하는 작업을 통과하면서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고물상 일의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
해미는 지창씨가 언제부턴가 자신 몰래 출장을 다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고물상과 관련된 일이라면 도대체 그녀에게 숨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해미는 지창씨가 두고 간 휴대폰 속에서 그 비밀을 찾아낸다. 휴대폰 문자함에는 지창씨에게 유품정리 일을 부탁하는 누군가의 문자가 들어 있었다. 그제야 해미는 지창씨가 왜 그토록 수상하게 행동했는지 알게 된다. 죽은 이들이 머문 공간을 새것처럼 정리해야 하는 자신의 일을 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지창씨 대신 유품정리 일에 뛰어드는 그녀. 해미는 유품정리가 마치 오랫동안 해온 일인 것처럼, 혈흔과 시취가 짙게 밴 공간을 깨끗이 지워내고, 망자의 물건들을 거침없이 분류하고 소각한다. 그사이 지창씨는 초등학교 동창인 정우성이 주고 간 설계도면을 받아들고 새로운 꿈을 꾼다. 고물들로부터 그 어떤 것들보다 값이 비싸게 나가는 희귀 금속 이트륨을 분리해내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는 꿈 말이다. 그는 설계도면에 따라 기계를 하나 제작해내고, 그 기계를 가동하여 고물들로부터 순수한 이트륨을 뽑아내고자 한다. 하지만 번번이 그의 손에 쥐여지는 것은 빛나는 이트륨이 아니라 불순물이 섞인 검은 돌덩어리일 뿐이다.
고물상의 호황기는 빠른 속도로 저물어가고, 지창씨와 해미의 삶도 그 기울기에 따라 한층 낮은 곳으로만 향해 간다. 삶이 나락으로 떨어질수록, 결코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꿈은 어째서 더욱 강력히 그 위력을 떨치는 것일까. 지창씨는 순수한 이트륨을 얻기 위해 생계마저 내팽개친 채 기계 앞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이제 해미는 유품정리 일에 더욱 매진할 수밖에 없다.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옥에서의 삶에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삶.
해미는 유품정리 일을 하면서, 자살을 계획하고는 사후 자신의 방정리를 부탁하는 청년, 산달을 앞두고 남편이 남긴 혈흔과 시취를 지워달라는 여자, 죽은 사연과 방법이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한 호텔 투숙객 등 세계의 슬픈 표정을 마주하게 된다. 소설가 이유는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장면에서도 감정을 충분히 절제하여 이 비참한 세계를 꼼꼼히 직조해냈다. 담담하면서도 날카로운 문장들로 이루어진 이 세계를 들여다보는 우리의 눈에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숨쉬고 있는 현실세계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한쪽밖에는 보이지가 않아서 한쪽으로밖에 갈 수 없는 사람들. 죽음이 아니면 달리 편안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란 바로 우리, 만약 지금 그렇지 않다면 곧 그렇게 되고야 말 우리의 비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이들의 곁에 머무르고자 한 소설가 이유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애써 외면해온 세계의 슬픔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
지창씨는 딱 한마디만 했다.
“요즘은 나쁜 짓 안 하고 잘사냐?”
“나쁜 짓 안 하고 어떻게 잘살아?”
해미가 끼어들었다.(107쪽)
“무슨 과랬더라? 그래, 항공우주공학과.”
“얼마나 멀리 도망치고 싶었을까.”(145쪽)
“열흘쯤 됐나봐요?”
해미가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보면 알 수가 있나요?”
여자는 놀란 눈을 했다.
“혈흔이 퍼진 정도나 냄새로 알 수 있죠.”(155쪽)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한쪽밖에는 보이지가 않아서 한쪽으로밖에 갈 수 없는 사람들. 죽음이 아니면 달리 편안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206쪽)
*
감정의 절제를 유머로 치환한 간결한 내러티브가 매우 개성적이다. 군더더기 없이 짧게 끊어치는 묘사가 날카롭고 유쾌하게 각인된다고 할까. _은희경(소설가)
겉보기의 가벼움 뒤에 삶과 문학에 대한 깊은 고뇌와 상당한 단련을 숨기고 있다. _이상운(소설가)
슬픔의 총량이 많아지는 삶, 그런 삶의 와중에 놓인 사람들은 땅에서 쉽게 발을 뗄 수가 없다. 작가는 그런 사람들 틈에 있으려고 했던 것 같다. _강영숙(소설가)
나는 항복했다. 날이 저물고 으슬으슬 춥고 배가 매우 고파서가 아니었다. 뭐 전혀 아닌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내가 몰랐거나 간과했던 장점에 충분히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_박형서(소설가)
이야기를 절제할 줄 알고, 커다란 이야기를 조그마한 장면들로 나눠놓고 이어붙이면서 무거운 이야기를 경쾌하게 읽을 수 있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_권희철(문학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교수)
고물상의 시대에서 기계 발명의 시대로 진화해왔으나, 이제 젊은 세대에게 남겨진 과업이란 비참한 죽음들을 마무리하는 사후 ‘소각’뿐이라는 비참한 세대 인식이 여기에는 자리하고 있다.
_강지희(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