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는 세계의 파국을 조망하는 웅숭깊은 시선
하나의 소우주로 창출된 텍스트를 통한 구원의 모색
길 없는 길을 따라 내딛는 어느 젊은 평론가의 사려 깊은 한 걸음…
“나는 조형래를 사로잡고 있는 이 세대적 자의식에 압도되었다. (…)
이 순간 우리는 역사철학적 위기의식이 정신분석학과 몸을 섞는 장면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대담한 관능 앞에서 눈감지 않을 자신이 없다.”
―신수정(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 조형래는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먹고 배설하는 신체로 회귀하라―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 자세히 보기」로 대중문화평론 부문에 당선, 이듬해 『문학동네』에 문학평론을 발표하면서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문학과 영화를 아우르며 다방면에 걸쳐 있는 관심사를 쉼 없이 좇아온 지 7년, 그의 첫 평론집을 묶어 낸다. 김훈과 김영하, 김연수, 박민규, 천명관, 김중혁에서부터 박솔뫼, 윤고은, 최진영에 이르기까지 가장 ‘동시대적’이라 할 수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동시대 문학의 흐름과 그 안에서 새롭게 읽어야 할 문학의 지형을 담았다.
‘신 없는 세계의 비참’이라는 제목은 『팡세』의 제2장 ‘신 없는 인간의 비참’이라는 소제목을 평론집의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변형한 것이다. “인간이 움켜잡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명제뿐”이며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한다. 삶과 죽음의 모든 원리를 포섭하는 우주 전체의 도저한 실재와 법칙 앞에 인간은 그 일부에 불과할 뿐 아무것도 아니다”라 말하는 저자는,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그 어떤 근거나 구원에 의지하거나 얽매일 수 없다는 것은 (…) 역설적인 의미에서 우리 스스로를 전례 없이 엄혹한 자유와 해방의 조건에 입지하도록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파스칼이 말한 ‘비참’ 속에 ‘위대함’이 내포되어 있었듯, ‘비참’의 시각에서 인간을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위대함’의 흔적들을 읽어냈듯, 저자는 ‘비참’과 ‘위대함’이 맞물려 있는 세계의 이중적 구조를 직시한 뒤에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을 천착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그는 미로 속을 헤매는 가운데 각양각색의 텍스트, 특히 소설이 길잡이가 되어주었으며 “어떤 다른 언어로 환원되거나 치환될 수 없는 단독적인 사건이자 소우주로 창출된 텍스트”들의 인도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길을 만들어갈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1부 ‘파국과 파견 사이’에서는 정미경, 서하진, 정이현, 이홍, 최진영, 김영하, 김훈, 김애란, 김성중, 편혜영의 소설을 통해 탈-내면화된, 사이버네틱한 후기근대의 풍경과 파국의 부정성(否定性)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종말은 미래의 재해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도래해 있거나 아직 미처 박두하지 않은 무엇이다. 그것은 시간성이 무효화된 현세의 미로 속에서 폭력이나 성장의 아이러니 등 갖가지 이유로 방황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주검을 사전에 목도하며두려움에 떠는 인간 자신의 모습 안에 선재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주검들을 애도하며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끝의 징후들을 언제나 간접적으로 예감하는 행위야말로, 파국 이후를 보고 또 대비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주검을 보는 일, 이것이 바로 아직 오지 않은 구원의 단초다.
(「파국과 파견 사이」, 115~116쪽)
2부 ‘신 없는 세계의 비참’에서는 편혜영, 강영숙, 윤고은의 장편소설과 정용준의 장작품들을 통해 “어떤 실체도 없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인과에 의해 작용하지도 않는” 그림자의 실체에 다가가본다. 그것은 작품 속에서 보편성을 갖게 된 죄와 피가 빚어내는 파국의 모습으로, 벗어날 수 없는 ‘나 자신’의 모습으로, 지고의 사랑으로, 말해지지 않은/못한 말로 다루어진다.
아무리 먼 곳으로 떠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아령하는 밤」의 주인공들은 상징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원위치로 회귀하는 것을 전제로 투어할 뿐 좀처럼 이주하거나 월경하지 않는다. 현전하는 무수한 외부의 이미지나 계기들과 조우하지만 자신의 원점으로 수렴되는 풍경으로 대할 뿐 그 핵심에 진입하는 것은 한없이 주저한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고 해서 그곳이 안주할 만한 중심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삶이라는 투어는 반복될 것이다. 자신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 외부는 물론이거니와 내성으로 소행(溯行)하는 과정조차 종종 그 낯선 얼굴을 거듭 드러낼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일체를 생소한 것으로 거리를 두고 대상화하는 자의식의 무한한 여정이 강영숙의 소설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렇게 완전한 대단원은 유예된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삶도,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도 우로보로스의 형상처럼 지속될 수 있다.
(「투어의 파노라마」, 128~129쪽)
3부 ‘너의 얼굴로 돌아보라’는 천명관, 노희준, 정미경, 김중혁, 박민규, 김연수, 백영옥 등의 작품론을 모았다. 소설이라는 이야기의 미로 속에서 우리는 “고통과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전시하는 세태에 대한 거부 및 그에 대한 치유와 위로의 필요성”을 되새기거나, “스스로의 존재를 감당하는 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라는 지극히 자명하고도 고독하기 그지없는 진실” 앞에서 어떤 삶의 방식을 가지고 갈 수 있을지 곱씹을 수 있다.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하고 소설의 사회적 역할을 기대하지 않는 관점이 지배적인 오늘날 “미학적 형식으로서의 소설 또는 이야기의 무한 증식이라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타진하는 일”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고찰 역시 소설이라는 장르가 어떤 비전을 제시해나갈 것인지 숙고해보게 한다.
그 이중삼중의 형해화된 형식들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또한 무엇인가”에 대해 가능한 유일한 응답은 다름 아닌 “너의 얼굴로 돌아보라”는 것뿐이다. 물론 이에 응답한다고 해서 넘버의 무의미한 반복과 답습의 순환에 구애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응답하지 않을 수도 없다. 모든 개인은 너의 얼굴로 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자기가 되었다. 『넘버』의 너와 나를 추적하는 모험은 이와 같은 역설을 적나라하게 체현한다.
(「너의 얼굴로 돌아보라」, 201쪽)
‘인타라망(因陀羅網)’을 인터로망(inter-roman)으로 오독해보자. 어떤 원인도 이유도 없이 닥친 당혹스러운 사태 앞에서 갑작스레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한 삶, 어떤 출구도 발견할 수 없을 그와 같은 악몽이 연쇄적으로 파급되어가는 인드라의 그물, 그것과 흡사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는 것일 터이다.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이 그물처럼 상호-교차하여 이루어지는 거대한 이야기의 우로보로스적 연쇄 속으로 밀어넣어진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난국에 봉착하게 되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바깥의 다시 또 그 이야기. 그 이야기의 그물망 사이의 무(無) 또는 아득한 간격 내부에서 헤매지 않을 수 없는, 시작과 끝이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 이야기의 미로이다. 그렇다면 이 인터로망이야말로 박성원의 소설을 가리키는 가장 정확한 명명이 되지 않겠는가.
(「소설이라는 이야기의 미로에 대처하는 세 가지 방법」, 233쪽)
4부 ‘기계의 이야기, 이야기의 기계’에서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과 <추격자>를 비롯해 시공과 차원의 월경, 텍스트 간 경계를 초월하는 소설 작품들을 분석한다. 월드와이드웹이라는 장치가 바꾸어놓은 이 시대 개개인의 감각과 일상이 손보미, 이상우, 김솔, 오한기 등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 박민규 단편소설 「로드킬」과 이인화 장편소설 『지옥설계도』를 통해 세계의 형상의 감추어진 비의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엿볼 수 있다.
월드와이드웹이라는 장치가 이 시대 개개인의 감각과 일상, 이력을 실질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물질적 조건이 되고 있는 만큼 텍스트 역시 부지불식간 이러한 조건에 유비되거나 구속되지 않을 수 없는 난감한 사태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한기와 이상우의 소설은 어떤 단일한 정체성이나 진정성을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개인의 난국을 조장하는 자연에 대한 반감의 비애를 표현한다. 손보미의 근작은 일체를 불가해한 모순·역설·교착·회귀의 무저갱으로 이끌어들이는 객관의 중력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맞서는 일말의 가능성에 대해 몽상하고 있다. 김솔의 소설은 아예 소설의 데이터베이스를 횡단·질주하는 모험이 무의미할지언정 기꺼이 감행할 만한 유쾌한 것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의 폐허를 자의식적으로 다시 쓰고 또 ‘변경’하고자 하는 그들 각자의 시도에 과연 어떤 가능성도 없다고 잘라 말할 수 있는가. 바로 이 백억분의 일 오차의 지점에 소설 형식의 도약과 추락이라는 양가적인 가능성이 모두 사전에 예비되어 있다. 우리는 이 ‘분명한 것들(to phaneron)을 아는 것과 관련해서도 속는’ 모험을 기꺼이 감행해야 한다.
(「폐허의 정령」, 335~336쪽)
5부 ‘우리는 원무(圓舞)를 추며 추측하지만, 비밀은 가운데 앉은 채 알고 있다’에서는 이기호, 박솔뫼, 백가흠, 조경란 등의 작품에 대한 비교적 짧은 작품론을 만날 수 있다. 현장비평에 성실히 임해온 그의 섬세한 작품읽기가 돋보인다.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는 뜻이다. 삶과 죽음은 표리이며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복어의 살과 뼈와 눈과 장기만을 보고 다룰 수 있을 뿐, 독이 환기하는 죽음의 추상성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삶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전부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복어』가 삶과 죽음의 분리 불가능성이라는 아포리아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시인하고 있는 진실이다.
(「죽음에 이르는 삶」, 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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