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문학동네시인선 089 이문숙 시인의 시집 『무릎이 무르팍이 되기까지』를 펴낸다. 1991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2005년에 첫 시집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2009년에 두번째 시집『천둥을 쪼개고 씨앗을 심다』를 펴냈으니 햇수로 8년 만에 내는 새 시집이자 세번째 시집이다.
처음에서 두번째로 건너갈 때가 4년, 두번째에서 세번째로 걸어갈 때가 8년…… 시집을 두고 시간의 가늠으로 계산법을 논하는 게 무의미할 수도 있겠으나, 그 증폭된 시간에 호기심이 인 건 그사이 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싶은 궁금증 때문이었다. 물론 이는 그간 시인이 써왔던 두툼한 시 묶음을 다 읽고 난 뒤에 드는 마음의 일렁임이 연유한 탓도 되렷다. 무게가 주는 묵직이 아니라, 시를 향해 머리 숙인 그 마음으로 인한 그늘의 묵직함이 너무 깊게 드리워져 있었으니 말이다.
총 4부로 나뉘어 담긴 이번 시집의 소제목을 보자면 이렇다. 하얀 윤곽의 사람, 무릎이 무릇 무르팍이 되기까지, 투숙객은 언제나 뒷모습만 보여준다, 언제나 빙글빙글. ‘하얀 윤곽의 사람’은 산 사람이거나 혹은 삶을 건넌 어떤 사람이 아닐까 싶다. ‘무릎이 무릇 무르팍이 되기까지’는 무수히 걷고 또 걸어본 자만이 입에서 툭 뱉어낼 수 있는 진리에 가까운 말일 것이다. ‘투숙객은 언제나 뒷모습만 보여준다’에서의 투숙객과 뒷모습, 이는 안주가 아니라 언제든 떠날 준비 속에 사는 우리들의 초상일 것이며 그 맥락 속의 ‘뒤’가 어쩌면 우리들 모두의 ‘앞’이자 ‘얼굴’임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언제나 빙글빙글’, 그럼에도 우리는 돈다. 돌고 돌아 다시 여기다. 이를 절망과 동시에 희망으로 본다면 너무나 단순한 풀이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산 자이면서 동시에 준비된 죽은 자이니 다시 처음 얘기한 ‘하얀 윤곽의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갈 수가 있다. 이 한 권의 시집을 한 편의 장시로 이해하며 읽어도 되겠다, 라는 생각이 그리 무리는 아니겠다, 라는 생각은 그러니까 이 돌고 돎의 회귀에서 또한 비롯된 바라는 거!
“이문숙의 이번 시집은 구체적인 사연에서 착수해서 기이한 사태를 우리로 하여금 겪게 하고, 겪게 된 만큼 미지의 틈을 열어, 생생한 죽음의 그림자를 날것으로 삶의 장면과 장면의 틈바구니에 붙잡아두고, 일상의 결핍과 파열을 특이한 방식으로 끌어모아, 주관성의 세계 하나를 거뜬히 개척해낸다. (……) 이문숙의 시는 자주 병원에서 삶의 비애를 엿보고, 망자가 된 자들, 저 물 위에 제 젖줄을 제공하려 부표 하나를 꽂아놓고, 차가운 얼음 같은 세계에 잠시 웅크리고 기다리며, 하나의 정체성으로 포괄되지 않는 세계를 지금-여기에 포개놓는 일에서 삶의 비극, 저 비극의 기원을 순식간에 폭로하는 각성의 목소리로 일상에서 꿋꿋이 삶의 윤리, 시의 가치를 찾아 나선다.”
-조재룡 해설「소진하는 주체, 각성의 파편들」중에서
짐작해보건대 시인은 꽤 아팠던 듯싶다. 심히 오래 앓아본 자가 이를 앙다물고 통증을 삼켜낸 이후의 말들 속에 시가 박혀 있다고도 보는데, 바로 이문숙 시인의 이번 시집이 그 한 예로 섬겨진다. 엄살을 허용하지 않는 말, 약에 의존하지 않는 말, 떼쓰기를 용인하지 않는 말, 그렇게 “쫄쫄거리다가 피어나는 어떤 게” “어렵사리 있”는 말. 그래서인지 다 읽고 났을 때 마음이 파여서 아프기보다 내 마음의 허허처럼 당신 마음의 허허도 함께 확인할 수 있어 안도라는 말을 다시금 섬기게 된다. 우리가 무릎을 일컬어 ‘무르팍’이라 부를 때의 그 소진, 그 쓰임, 그 닳음, 그러나 몸이 나서서 말해주는 그 지극함이라는 증거…… 왜 시를 써야 하냐면 일단 좀 걸어보시라고 이문숙 시인이 말하지 않을까 싶다. 이 시집은 그런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