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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
후배 시인 이수명은 1993년에 출간된 선배 시인 박상순의 첫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를 두고 근래에 펴낸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이렇게 논한 바 있다. “이 시집은 아무 예고도 없이, 전조도 없이 와서, 아무 파란도 없이 처음에 왔던 그 자리에 아직도 서 있는 듯 보인다. 1990년대나 그 이후는 이 시집의 이상한 기운을 충분히 호흡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거리감을 갖고 바라보았을 뿐이다. 이 말은 이것이 아직도 소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 이 시집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중요한 내용들을 품고 있음이 틀림없다.”(『공습의 시대』, 문학동네, 2016, 130쪽)
이수명 시인의 말마따나, 물론 동조하는 마음에 반복하여 거드는 대목이기도 하거니와, ‘아무 예고도 없이, 전조도 없이 와서, 아무 파란도 없이 처음에 왔던 그 자리에 아직도 서 있는’ 시인 박상순. 그의 시를 읽어온 독자라면, 특히나 그의 시에 매료되어온 독자라면 무심히 물에 돌을 던진 듯한, 그러나 정확하게 그 중심을 가늠하여 어깨를 휘둘렀다 할 이 설명에 무조건 수긍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박상순의 시는 어느 날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서 지금껏 우리 앞에 우뚝 하고 서 있는 지경이고 무릇 절경이다. 더 거슬러 가보자면 1991년 『작가세계』로 데뷔했을 때부터 26년이 지난 지금껏 그는 참 홀로라는 참이다. 누구도 따라갈 수 없고 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시들을 그는 연신 피워대는 담배연기처럼 대책 없이 우리들에게 흘려놓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연기 같은 시들을 좇으며 우리들은 매캐하면서도 아찔한 그의 시적 혼돈에 겨워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1996년에 출간한 두번째 시집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2004년에 출간한 세번째 시집 『러브 아다지오』에 이어 2017년에 펴내는 그의 네번째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 햇수로 13년 만에 펴내는 박상순 시인의 신작 시집을 말하기에 앞서 서두가 길었던 건 긴 시간을 함께 통과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시는 출연 당시의 첫, 그 처음처럼 우리에게 여전한 새것으로 느껴지는 연유가 아닐까 싶다.
왜 그의 시는 항상 시라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달아나 있나. 왜 그의 시는 항상 시라는 예측으로부터 빗겨나 있나. 이 멀어짐, 이 새로움, 이 낯섦을 기폭으로 총 52편의 시가 3부로 나뉘어 담긴 이번 시집은 한국 시단에서 흔히 볼 수 없던 독특한 개성과 그만의 리듬으로 독보적인 자리매김을 한 박상순이라는 시인의 진가를 다시 한번 여실히 드러내 보일 수 있게 완벽하게 세팅된 무대다. 일견 그래왔던 것처럼 녹녹하게 읽히는데 그 뒷맛은 녹록치가 않다. 꿈틀대는 말의 뼈마디가 유연하기 그지없는데 그 부드러운 관절들의 춤을 뭐라 제목 짓기 또한 만만치가 않다. 무작정 덮어놓고 좋은데 그 좋음을 도통 설명할 길이 만무하다면 그 좋음은 실로 진실이고 진심이 아닌가. 시마다 참으로 자유로운 사유가 반짝이는데, 시마다 반짝이는 자유 속에 나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규율이자 규칙이 새로 반짝여서 속도를 내어 걷다가도 이내 멈춰서서 나를 찾게 되니 이처럼 끝도 없이 나, 나라는 자의식을 물고 늘어지는 시집이 또 있겠나 싶은 감탄을 참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언어라는 슬픈 도구가 얼마나 풍요롭게 시의 잔치를 벌일 수 있게 하는지 그 일련의 과정들을 몹시도 아름답게 복작거리는 말과 그 말맛의 다채로움으로 펼쳐보이며 우리를 흥분시킨다. 박상순의 시를 눈으로 읽을 때와 박상순의 시를 입으로 읽을 때, 그리하여 박상순의 시를 마음으로 읽을 때 우리가 손에 쥐는 건 형체가 없는 슬픔의 덩어리다. 무게를 잴 수 없는 슬픔의 한 줌 또 두 줌. 잡은 듯해서 손을 펴보면 그 안에 텅 빈 덩어리로, 아니 덩어리였던 기억으로 고여 있는 어떤 감정의 기척. 박상순의 시는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는데 이는 시의 뜻이 아니고 시인의 의도도 아니고 바로 제 할 탓의 ‘우리’ 몫이다. 어렵게 읽으면 어렵고 쉽게 읽으면 쉬울진대 특히나 박상순 시인의 이번 시집은 읽는 순간 제 감각이 일순 시 안으로 빨려드는 분주함으로 일단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터무니없이 재밌고 터무니없이 발랄하고 터무니없이 경쾌한데 그 터무니없는 즐거움 뒤로 그만의 ‘파묻힘’이 있다. 아마도 시라는 매혹, 어찌할 수 없는 발의 빠짐 끝에 인정하게 되는 궁극의 아름다움. 시가 줄 수 있는 모든 매력과 마력이 박상순의 이번 시집 안에 다 있다고 하면 무리일까. 무리로부터 이미 벗어나 저 멀리로 등을 보인 채 홀로 가고 있는 시인이 벌써 보이고 있다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