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다 알기도 전에 과거가 되어버리는 가차없는 세계,
그 복판을 향해 느리게 태어난 사람들이 격발하는
‘삶’이라는 뜨거운 한 발!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로 제16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한 황현진의 신작 장편소설 『두 번 사는 사람들』이 출간되었다. 황현진은 등단작부터 “정말 하나같이 매력적인 캐릭터들”(문학평론가 류보선),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소설가 윤성희)라는 평을 들으며, 소설 속 인물들의 ‘살아 있음’을 입체적이고 매력적으로 그려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왔다. 그리고 오랜 시간 예비해온 두번째 장편소설 『두 번 사는 사람들』을 통해 세계를 살아가는, 혹은 살아낸 사람들의 ‘누구도 같을 수 없는 삶의 드라마’를 감정의 과잉 없이도 가슴 저릿하게 펼쳐 보인다.
“더 크게 울어라, 제발 더 크게, 더 오래 울고 또 울어라.”
1979년 10월 26일, 두 명의 박정희가 죽는다.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1917년생 남자 박정희의 육신, 그리고 1960년생 여자 박정희의 영혼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은 이 두 박정희의 죽음에서 시작해 1960년생 여자 박정희가 낳은 딸 ‘구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구구의 아버지 조금성은 아내 정희의 육신마저 떠나보내고, 홀로 하숙집을 꾸리며 억척스레 구구를 키워낸다.
금성의 하숙집에는 저마다 남다른 이야기를 지닌 인물들이 큰 물줄기로 흐르는 시내처럼 자연스레 모여든다. 삼시 세끼 홍시만 먹고 사는 홍시 할머니, 한전에서 근무한 금성의 이력을 빌려 컬러텔레비전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한 기욱, 기욱의 애인 순점, 운동권 청년 용태, 부잣집 아들 같지만 어딘가 수상한 만수가 바로 그들이다. 하숙집 한지붕 아래 부대끼며 서로의 상처를 돌보는 이들이지만, 처음 하숙집에 흘러들어올 때의 모습이 달랐던 것처럼 현실을 마주하고 극복해가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금성의 이력을 빌린 것이 화근이 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기욱, 사산아를 낳고 하숙집을 떠나게 되는 순점, 그리고 “대통령이라고 죽이지 못하겠느냐” 하는 날 선 결심으로 총을 꺼내 드는 용태까지……
어쩐지 불운하고 불행하게 느껴지는 삶의 굴곡들이지만, 움푹 팬 상처의 이면으로 어느새 새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황현진은 이들의 삶을 결코 불운하거나 불행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오히려 한 번 죽고 나서야 또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삶의 비의’를 넌지시 드러내 보여준다. 소설이 구구를 중심으로 한 삼대의 이야기라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째보와의 ‘혼인 불가’를 선언한 뒤로 졸지에 여성운동가가 되어버린 금성의 어머니 김말녀와, 쪼다이지만 마음만은 선량한 금성의 아버지 조복남. 고무공장 직원이지만 투전판으로 출근하는 일이 많았던 정희의 아버지 박두남과, 그의 첫번째 아내가 운영하는 미장원에서 일하던 정희의 어머니 두자. 그리고 조금성과 박정희에서 구구로 이어지는 삼대의 이야기는 수난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해낸 자들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번 살고 죽는 게 삶인데,
마치 한 번 살다가 죽을 것처럼 살아가려니 불편합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 스스로도 고백했듯이, 어쩌면 우리는 “여러 번 살고 죽는 게 삶인데, 마치 한 번 살다가 죽을 것처럼 살아가려니 불편”한 삶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무게에 비례하는 삶의 비의를 발견해낼 수 있다면 덜 고통스럽겠지만, 그럴 수 없기에 또다른 삶을 예비하고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온 생애를 기억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구구는 정희의 뱃속에서 있었던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차라리 사고라도 난다면” 하고 중얼거리던 엄마의 목소리나, 세상 밖으로 처음 나왔을 때 의사가 했던 “살렸어”라는 말을 구구는 마음속에 간직한 채 자라난다. 보르헤스나 마르케스의 ‘환상적 리얼리즘’을 연상케도 하는 이런 마술적인 설정은, 역설적으로 단 한 번의 삶을 사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구구는 바로 저 “살렸어”라는 말 때문에 잠시나마 자신이 죽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쩌면 엄마도 자신의 태어남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깊은 상처로 간직한 채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고 내일의 나도 예측 불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잊은 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고, 너무 많은 것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아닐까.
황현진은 두세 번씩 읽고 싶어지는 아름답고 시적인 문장들로 ‘누구 하나 똑같지 않은’ 인물들의 모습에 마땅히 그러할 수밖에 없었던 정당성을 세심하게 부여해준다. 그러니 황현진의 소설 속에서라면, 어떠한 인물도 어떠한 삶도 오래 머물러 있고 싶을 수밖에.
★
오래전에 나는 죽음의 얼굴과 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죽음은 내게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한 단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중 한 단어만이라도 알아들었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내 삶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삶이 지금과는 아주 달랐을 겁니다. 죽음은 내 방에 머물면서, 내 침대맡에 서서 며칠을 지내다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어쩌다 서로를 보았을까요. 죽음은 내가 자신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을까요. 아니면 그저 나한테 들키고야 만 것일까요. 그 때문인지, 나는 자주 누군가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오랫동안 궁금해하며 살았습니다. 한 사람을 죽음으로 끌고 가는 그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한 사람의 사인이 심장마비라면, 사는 동안 그를 죽도록 괴롭혔던 게 오로지 심장뿐이었을까? 우리의 사인은 우리의 삶입니다. 세상이 아프면 우리의 삶도 아픕니다. _‘작가의 말’에서
■ 책 속에서
세상이 미쳤어. 그 한마디 말로 모든 불가사의한 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의미심장한 일들이 아무 의심이나 저항 없이 사람들에게 이해되고 수긍되어졌다. 1979년의 세상은 잠시 미쳐 있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누구도 또다른 죽음을 애도해서는 안 되는 해였다. 그해 가을과 겨울,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단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느라 터무니없이 바빴다.(12∼13쪽)
용태야, 화는 혼자 삭일 수 있지만 분노는 큰 목소리로 말하고 아주 큰 글자로 써서 모두에게 보여주는 거야. 그러면 사람들이, 이 세상이 우리를 무서워해. 너무 무서워서 우리가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들을 수밖에 없어. 엄마는 이제 화내지 않고, 분노할 거다. 오늘부터 나는 분노하면서 살 거야.(116∼117쪽)
엉겁결에 팔을 잃고 나서야 알았다. 그것은 예고 같은 거였다. 조만간 닥쳐올 불행에 대한 막연한 예고. 불행이 한차례 지나간 뒤에 보다 순종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세상이 미리 준비해둔 경고.(131쪽)
그날 밤, 두남은 어둔 철공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통곡했다. 귀를 막고 고개를 세차게 저으면서 두자는 속으로 화를 삭였다. 남몰래 울어야지. 소리내지 않고 숨어 울어야지. 두자는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나는 제대로 슬퍼할 힘도 남아 있지 않고, 이제 딸의 죽음 앞에서도 울 수 없는 어머니로 남았는데, 다들 어쩜 그리 잘 울었을까?(258쪽)
그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정전은 난데없이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사고의 비교적 안녕한 결과였다. 대개 정전의 원인은 정전이라는 결과 그 자체보다 참혹했다.(261쪽)
총을 가져야만 했다. 손에 총을 잡아 쥐어야만 했다. 무엇이 용태의 과녁이 될지는 용태 자신도 몰랐다. 그저 막연히 대통령이라고 죽이지 못하겠느냐, 날 선 결심만이 그의 안에서 덜그럭거렸다.(284쪽)
문득 구구는 아수라장이 된 폭발 현장과 무관한 자신의 처지가 이상하게 여겨졌다. 너무 안온하고 무탈한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살아서 기쁘다기보다 모든 일이 지나간 뒤에 홀로 남겨졌다는 것에 소외감마저 들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세상 밖으로 내몰린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의 세계 같았다. 구구는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양말을 신었다. 자신이 주인공인 세계로 한달음에 달려나갈 태세였다.(336쪽)
■ 차례
1부 _9
2부 _93
3부 _197
4부 _295
작가의 말 _345
★ 황현진 │ 장편소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로 제16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중편소설 『달의 의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