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일본의 대문호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에세이 가운데 <도쿄 생각東京を思ふ>과 <유년 시절幼少時代>을 한 권으로 묶어 국내 초역으로 선보이는 것이다. 『음예예찬』으로 이른바 ‘그늘의 미학’을 제시해 산문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 그는 이 두 편의 글에서도 그의 독특한 경험과 통찰을 깊고도 군더더기 없는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도쿄 생각>과 <유년 시절> 모두 도쿄를 되돌아보며 비평하는 일종의 회상록이지만, 두 글이 쓰인 데 시간 격차가 있는 만큼 한 편은 근대화의 첨병으로서, 다른 한 편은 ‘무례한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전 에도의 잔향이 짙게 남아 있는 공간을 탐색해 들어간다. 유년기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 대한 애착이 담긴 두 편의 글은 마치 작가 자신과 동일시된 듯 더없는 열기를 뿜어낸다. 물론 겉으로 봤을 때는 애정보다는 ‘독설’을 뿜어내는 듯한 모양새지만, 이것이 바로 속절없는 눈물을 흘리며 드러내는 애정의 또다른 면임을 독자들은 꿰뚫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근대 대문호의 통렬한 도시비평
<도쿄 생각>은 이미 다른 지역으로 떠나 고향 도쿄를 등지며 살던 그가 1923년 간토 대지진을 계기로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을 그곳을 떠올리며 양가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에세이다. 도쿄나 도쿄 사람들에 대한 다니자키의 비판은 마치 오스트리아의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자신의 조국을 향해 드러냈던 증오만큼이나 신랄하다(물론 그 이면과 속내는 다르지만). 그가 보기에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시기를 거치며 에도 토박이들의 취향은 예전과 같은 기개도 없는 주제에 조악한 면만 이어받은, “삐뚤어진, 망국적인” 것이었다.
메이지 이후 도쿄는 근대화의 첨병을 자처하고 나서며 서양을 가장 앞서 모방했다. 에도는 흔적만 겨우 남아 도쿄는 어느덧 삭막해져버렸고, ‘고향’이라 부를 만한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니자키가 옛것을 그리워하며 향수병에 젖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중년까지만 해도 일본을 업신여기며 열렬한 서양 광이자 중국 광이었던 그의 눈에는 오히려 서양과 비교했을 때 도쿄는 너무 근대화되지 못했으며 초라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나는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의 도쿄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 차라리 큰불이라도 나서 쓰레기통을 뒤집어놓은 듯한 동네들이 몽땅 타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늑장 부리며 진전 없던 개량 공사가 순식간에 이뤄질 것이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아내와 딸의 행방이 걱정되면서도, 마음속 한켠에서는 내친김에 도시가 홀랑 불에 타버려 제대로 된 도시의 모습이 하루빨리 갖춰지길 바라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도쿄는 번잡하고 길이 질척거렸으며 울퉁불퉁한 도로와 무질서, 험악한 인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인지라 지진으로 도시가 통쾌하게 불탈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후련해졌”던 것이다.
도시의 겉모습에만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는 “도쿄의 어디에 그렇게 염증이 났나” 하고 자문하면서, “도쿄 사람의 취향이나 기질 같은 것은 전부 거슬린다”고 말한다. 도쿄의 중산층이라면 모두 자기가 ‘가장 센스 있는 사람’이란 착각에 빠져 있다고 할까, 뭔가 그저 얄팍하고 허세덩어리인 데다 열등감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한없이 착하긴 하지만 솔직하고 겁이 많은 데다 실리에 어둡고 심하게 낯을 가린, 더없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줬던 자신의 아버지는 어쩌면 도쿄 사람의 표본일지 모른다. “도쿄 사람이라는 자들이 그것도 혈기왕성한 젊은이란 사람들이, 마음가짐이 이토록 어릿하고 주눅 들고 꼬이고 시건방져졌다고 생각하니 만정이 떨어지는데 이것이 비단 젊은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라 도쿄 사람 전체가 그렇게 기질이 주눅 들고 쩨쩨해지는 것 같다”는 비판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뒤틀려서 나오는 게 아니다. 에도 시대의 문물과 역사, 간사이 지방 사람 및 서양인과의 비교 속에서 차분히 쓰인 까닭에, 이 에세이를 도시 비평이라고도 부름직하다. (“간사이에도 한량은 있지만 풍류객 타입 아니면 양갓집 서방님 타입으로 단순하고 확연한 데 반해, 도쿄의 근대적 한량이라는 치들은 복잡하면서 흐릿해서, 양서류적인 음흉함을 자아내는데, 이는 제국 도시 특유의 산물이지 결코 교토나 오사카에서는 볼 수 없는 종족이다.”)
뼛속까지 도쿄 사람이고, 도쿄는 다니자키 자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데 그는 왜 이런 글을 섰을까. 아마도 여기서 자신과 가까운 대상일수록 애증의 정도도 짙어져 조그만 것 하나까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참견하게 되는 인간 보편의 심리를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가 간사이로 이주해 살면서 유년 시절 눈에 익은 정겨운 풍경들을 만나 거꾸로 도쿄에 대한 그의 애정과 그리움은 신랄한 한 편의 에세이로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흔두 살 노인이 돌아본 유년 시절
이 책에 실린 또 다른 에세이 <유년 시절>을 쓴 것은 쇼와 30년(1955)으로, 다니자키의 나이 72세 때다. 이것은 메이지 20년대에서 30년대까지 소년의 눈에 비친 도쿄와 도쿄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류의 근대문학이 청춘의 내면극에만 초점을 맞춰 구축되었다면, 초등학교 전후 무렵을 다루며 삶을 돌아다본 이 에세이는 주류 문학에 대한 강렬한 안티테제라 할 수 있다.
사람은 노년에 이르러 기억력이 감퇴하면 어제오늘 일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유년 시절 뇌리에 박힌 일은 수십 년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니자키는 노년에 접어들어 자신이 기억하는 한 가장 오래된 일부터 쓰기로 마음먹었는데, 옛 기억을 더듬는 동안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줄로만 알았던 일들이 되살아나면서 그간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유년 시절에 빚져 있다고 깨닫게 된다. “나는 지금껏 내가 지금과 같은 인간이 된 이유는 청년 시절 이후의 학문이나 경험, 사회와의 접촉이나 많은 선후배, 혹은 벗과의 절차탁마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오늘에 이르러 뒤돌아보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경우에는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대부분이 의외로 유년 시절에 모조리 싹을 틔운 것으로, 청년 시절 이후에 내 것이 된 것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다니자키에게 ‘고향’이란 부모님께 이끌려 구경 갔던 9대 단주로나 5대 기쿠고로가 활약하던 시절의 ‘그 옛날 에도의 흔적’이 남아 있던 도쿄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어 니혼바시에도 고가도로가 놓여 하늘이 가려지고 그저 개천에 걸쳐진 다리 밑과 다름없는 삭막한 도쿄……. 그 어디에도 이미 ‘고향’이라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그리하여 다니자키는 활자로 그 공간을 복원해 묶어두게 되는데, 이는 어린 시절 자신의 눈에 비친 메이지 시대 도쿄의 저잣거리를 재현해두고픈 욕망의 발현이자, 삶의 연속성을 확인하기 위한 행위였을 것이다. 즉 다니자키에게 있어 이 글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변해버린 도쿄의, 메이지 중엽의 저잣거리 정취’를 통째로 재현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그는 기억을 더듬어 조사하거나, 친인척이나 아는 노인, 소학교 시절의 옛 친구들을 찾아다닌 것이다.
<도쿄 생각>도 반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바, 다니자키가 도쿄의 토박이임을 자부하는 것은 이 글에서 더 확연히 드러난다. 유년 시절에 만났던 훌륭한 스승과 좋은 친구, 가부키와 신악이 자신의 창작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만큼 유년 시절의 도쿄는 그의 문학의 근간이자 원형이다. 다니자키의 여성 숭배 성향과 탐미적 사고 및 상상력과 해박한 지식이 유년 시절에 씨 뿌려진 것임을 확인하는 과정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메이지 시대를 살았던 도쿄 서민들의 삶과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유년 시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신화나 역사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가 토마스 칼라일의 영웅 숭배와 왕양명의 선사상을 종횡무진 넘나들게도 하며, 그 당시 서민들의 먹거리와 놀이와 옷차림을 마치 눈앞에 갖다놓은 것처럼 세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가부키와 신악에 관한 그의 지식과 감각은 그의 독특한 문체가 완성되기까지의 자양분처럼 느껴진다.
기억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은 영원히 소실되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일종의 위기의식에서 쓰인 이 글은 순간마다 감촉으로 단편화되는 삶에 저항하여 그 한결같은 인생을 보장받으려 한 문학인의 바람이 투영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