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와 무지 사이, 그 미려한 문학의 길을 찾아서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장경렬의 새로운 평론집 『예지와 무지 사이』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늘 꾸준히 학문에 매진하며 의미 있는 비평과 번역작업을 해온 그는 동시대의 한국문학 역시 성실하게 읽어왔다. 다채로운 모습으로 웅숭깊은 작품세계를 펼치고 있는 중견 문인들을 중심으로 쓰인 이 평론들은, 언뜻 지나치기 쉬운 한국문학의 독특한 면모를 조명하여 독자들이 새로운 독서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이 책은 그가 써온 문학론들을 최근의 흐름과 이해에 알맞도록 대폭 수정하고 보완하여 수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급격하게 변해가는 정보통신 환경에 발맞춰 컴퓨터와 인터넷이 일반화되어 있는 우리 시대의 글쓰기를 논했으며, 1990년대에 활발히 진행되었던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세세히 종합하여 정리한 글들도 주목해볼 만하다.
제1부는 ‘컴퓨터 시대의 글쓰기, 그 가능성을 찾아서’라는 제하에 구전문학에서부터 붓과 펜, 타자기를 거쳐 마침내 컴퓨터로까지 발전한 인류의 글쓰기 도구에 대해서 우선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그리고 인터넷을 이용하여 널리 퍼져나가고 있는 문학작품들의 양상과 앞으로의 모습 또한 짚어본다. 또한 기술의 발전, 온라인 게임의 부흥과 더불어 함께 번성한 환상문학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인터넷을 문학의 통로로 사용한다고 해서 문학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종이 책을 통해 발표되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또한 이미 종이 책을 통해 발표되었던, 문학작품이나 문학 관련 글들이 인터넷 공간을 채우고 있으며, 커다란 이변이 없는 한 이 같은 상황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구비 문학에서 활자 문학으로 바뀌면서 문학이 근본적 변화를 겪었듯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전달 매체로 인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문학은 무언가 근본적 변화를 겪을 것이다. 그러한 변화의 양상과 정도가 어느 정도일지, 또한 어느 방향으로 문학이 변화해나아갈지를 모를 뿐, 변화는 필연적인 귀결일 수 있다.(53쪽)
제2부에서는 ‘우리 시대의 시 텍스트를 찾아서’라는 제하에 함윤수, 함혜련, 김종철, 나태주, 이정주, 김기택의 시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녕코, 비록 헛되고 어리석은 몸짓이라고 해도, 예술가는 영원을 붙잡으려는 몸짓을 포기할 수 없다. 이를 포기함은 곧 ‘끝이 없는 오랜 즐거움’에 대한 탐구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예술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 행위란 어리석은 몸짓일 수도 있지만 이와 동시에 비극적 영웅의 몸짓일 수도 있다. 문학사와 철학이 말해주고 있듯, 죽음과 파멸을 예견하면서도 매혹적인 탐구의 대상 앞에서 뒷걸음치지 않는 자가 바로 비극적 영웅으로서의 시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인은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불나방과도 같은 존재, 파멸을 감지하면서도 여전히 매혹된 불을 향해 다가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189~190쪽)
제3부에서는 ‘우리 시대의 소설 텍스트를 찾아서’라는 제하에 현길언, 유익서, 김석희, 김동민의 소설작품, 그리고 황선미의 동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화와 추상화에 경계의 눈길을 늦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경계의 눈길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문학이고 인문학 교육이 아닐까. 문학 또는 인문학 교육은 대상의 타자화를 뛰어넘어 대상을 적극적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그 무엇, 내가 곧 남일 수 있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다친 새끼 참새를 정성스럽게 돌봐주도록 하고 그 새끼 참새에 대한 어미의 안타까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문학 또는 인문학 교육인 것이다.(278쪽)
제4부는 한국문학계에서 벌어진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드러낸 글들을 모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와 수용부터 모더니티의 의미에 관한 정리까지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나름의 미를 갖는다면, 바로 이처럼 오늘날 우리 세계의 변화를 검토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한에서 그러하다.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모든 논의가 다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주변에서 쉽게 확인되는 불성실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은유적 신비화나 환유적 단순화를 통해 실체화하려는 조급성을 보이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라면 이는 마땅히 재고(再考)되어야 한다.(332쪽)
장경렬은 인간이 예지와 무지 사이를 늘 넘나들고 있으며, 이를 삶과 현실의 숨결이 감지되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환기시키는 것이 문학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문학은 깨우침을 강요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부드럽게 인도한다. 이러한 ‘무지와 예지 사이’에서는 광인과 시인이 다르지 않다. 이들은 자유로운 정신을 바탕으로, 참을 수 없이 반듯한 사회에 순응하기를 거부한다. 숨막힐 정도로 답답한 현실에 균열을 내어 우리가 숨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어쩌면 장경렬의 바람처럼, 시인이든 광인이든 현실에 저항하고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헤매는 이들 모두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거주할 수 있는 곳이 이 세상이기를 바라는 염원이야말로 문학일지도 모른다.
*
문학의 일깨움은 적지 않은 종교적 담론이 그러하듯 신비주의적이지도 않고, 수많은 철학적 담론이 그러하듯 관념적이지도 않다. 문학은 인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와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그 어떤 담론보다도 편안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말하자면, 별도의 ‘준비된 시선’이나 ‘무장된 시선’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문학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의 일깨움이 사소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문학의 일깨움은 때로 우리의 평온한 의식을 흔들어 뒤엎기도 하고, 때로 기존의 도덕관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뛰어넘어 새로운 미래로 우리의 정신을 안내하기도 하지 않는가.
―‘머리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