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첫눈에 반했다’는 말로는 도무지 설명이 부족한 순간을 맞이한 적이 있다. 상대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긴 경험 같은 것 말이다. 이 책은 그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신이라서 가능한 날들이었다』는 한 남자의 진솔한 연서이다. 사 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사랑해온, 단 한 사람만을 위해 꾹꾹 눌러 담은 마음이다.
이 연서의 저자 정기린은, 평범한 한 남자다. 그에게도,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한순간이 있었다. 바로 ‘당신’을 처음 본 순간. 그 이후로 저자는 ‘당신’이 궁금해졌고, ‘당신’은 그의 마음을 가져가서 오래도록 그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당신이 없으면 온전히 설명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버리도록 그를 제자리에 놓아주지 않았다. 저자는 당신이라는 존재에 매일을 휘청거리며 살았다. 하여, 저자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과 가장 잘 사랑할 수 있는 법, 자신으로부터 상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에 대한 깊은 고뇌와 번민을 이 연서에 녹여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편지를 쓰는 일 말고는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편지들을 묶어놓은 이 책은, 그에게 비단 ‘편지’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끓여 영원이라는 집착을 휘발시켜내는 동안, 그 곁에서 끊임없이 장작불을 지펴 올려 타오름을 지켜내는 동안, 나는 내내 슬프고 참 많이 슬플 겁니다. 그러다보면 그 슬픔이 고갈되어 나는 종내 밝은 빛을 내게 되거나, 혹은 그 슬픔이 눈물에 희석되고 희석되어 언젠가 투명하게 일렁이는 바다를 이루기라도 할 모양일까요.
당신을 사랑하는 일로, 나는 그만큼씩 자연스러운 존재가 되어갑니다.
_‘당신에게 나여야만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64-65쪽 중에서
이제는 마주볼 수 있게 된 그대의 두 눈에서,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을 만납니다. 당신이라는 타자를 온전히 헤아릴 때에야 비로소 나는 간신히 나 자신일 수 있을 것임을, 그리고 또한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일 때 비로소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임을, 이제는 알겠습니다.
_‘신은 볼 수 없는 풍경’ 139쪽 중에서
이 진솔한 연서는 ‘봄:비밀의 정원’ ‘여름:청춘靑春’ ‘가을:인간 영혼의 지도’ ‘겨울:황홀한 사랑의 폐허’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일 년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당신의 이름을 붙여놓고 그는 계절을 나고 있다. 여러 계절을 보냈으나 그 긴긴 날씨들 모두, 그에겐 당신이라는 계절이었다.
지나가는 계절과는 상관없이 나는 여전히 당신이라는 시절을 살게 되었으니, 내게 이 계절의 이름은 끝내 당신이고 말아버리는군요. 목전의 겨울에게 잘 지내느냐고 보고 싶다고 안부 인사 같은 걸 혼자 중얼거려도 보는 건, 사실 나는 잘 못 지내고 있다고 이상하게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그 말이 하고 싶었는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_‘바로 서서 혼자 걷기 : 작별을 말하다’ 175쪽 중에서
사시사철 당신이라는 계절만을 살았었기에 매일매일이 추수감사절이었으며 매일매일 청고한 달빛 아래 등불을 밝혀 강물에 띄워 보낼 수도 있었던 날들을 뒤로하고서, 오늘밤도 나는 그 사육제에 기꺼이 합류하여 이제 내게 남은 단 하나, 끝내 지워내지 못한 단 하나, 당신의 이름에라도 내게 허락된 모든 예의를 다해 올리려 합니다. 온전한 작별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건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까요.
_‘카니발 아무르 : 황홀한 사랑의 폐허’ 186-187쪽 중에서
이 연서는 하나의 악보이기도 하고, 한 사람을 품에 안았다가 내보내며 새긴 하나의 나이테이기도 하다. 선율처럼, 상처처럼, 저자의 사랑은 곡선을 그린다. 그것이 완전하고 아름다운 음악이길 바랐지만 즉흥적인 광시곡이 되어버렸고, ‘당신’은 그에게 때마침 내리는 비, 시우時雨인 줄 알았으나 영원한 폭우暴雨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살아내도 당신이라는 계절은 영원할 것만 같았고, 그 모든 날들은 당신이라서 가능했다.
저자에게 ‘당신’이 있듯, 우리에게도 각자의 ‘당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당신이라서 ‘가능한’ 날들도 있었다. 그런 ‘날’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지금의 자기 자신이 되어 있다. 특별한 타인이 한 존재를 어떻게 살아가게 만드는지, 한 존재가 특별한 타인이 되는 순간 삶은 어떤 방향으로 옭아매어지는지, 우리는 그 길을 걸어보아야 알 수 있다.
『당신이라서 가능한 날들이었다』의 모든 문장들엔 ‘당신’의 힘이 가닿아 있다. 이 저자의 문장들을 읽으며 우리는 ‘당신’이 되기도 하고 각자의 ‘당신’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시간은, 오래된 보석함에 열쇠를 넣어 돌려보는 일이 되기도 하며 끝내 한번은 큰 숨을 섞어 웃게 될 일이기도 하다.
그러하니 더이상은 당신도 이 사랑도 기만치 않도록, 나는 마침내 이 생의 절대적인 중심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당신에게 이별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인사가 온전하도록, 언젠가 내 두 발로 자신 광활한 세계의 경계를 넘게 될 때까지 바로 서서 혼자 걷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겠노라 약속합니다.
이 세계의 끝에서 내가 만나게 될 사람이 오직 당신이기를 바라는 영원할 기원은, 그날까지 제 안에 묻어만 두고서요.
당신과 작별하는 날이 정말로 오늘일 거라고는,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습니다.
_‘바로 서서 혼자 걷기 : 작별을 말하다’ 181-182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