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식물이 들어온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조금의 초록만으로도 그곳은 자연스럽고, 생기 있고, 아름다운 곳이 된다. 도심 한복판에서 가드닝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원예가 박기철은 식물로 공간을 디자인할 때 무엇보다 어울림을 생각한다. 식물 자체의 아름다움과 공간과의 어울림, 식물과 식물을 다루는 사람과의 어울림, 식물의 시간과 계절의 어울림 등이 그것이다. 식물을 기반으로 사옥, 갤러리, 백화점, 기업 내부, 팝업 스토어 등의 공간을 꾸미는 그는 “평범한 일상의 영감을 통해 소재를 재해석하고, 식물 본연의 아름다움과 공간의 어울림을 생각하며” 가드닝을 한다고 말한다. ‘평범’과 ‘본연’이 말해주는 바는 단순하다. 억지스럽게 도드라지기보다 가장 돋보이는 때, 알아봐줄 존재를 그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다.
긴 기다림 끝에 자리를 잡은 그의 가드닝 스튜디오 ‘식물의 취향’에서는 오후의 시간이 그렇다. 창백한 벽에 달린 몇 개의 선반에 듬성하게 놓인 화기와 식물들, 문진과 나무토막과 죽은 나뭇가지, 제멋대로인 듯 늘어진 가지와 이파리들. 그 사이사이로 조용히 형태와 농도를 바꿔가며 일어섰다 누웠다 물러나는 빛. 꽃가게나 화원에서 혹은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야생 초목과 원예종은 분재의 형태로 심겨 새롭게 제 모습을 찾아간다. 전지를 마치고 얼마간의 기다림을 끝낸 식물은 우리가 이전에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던 자신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드러낸다. 자연스레 바라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식물에도 얼굴이 있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다른 장면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이것을 고려해 한 화기에 두 가지 이상의 식물을 함께 심기도 한다. 한데 심긴 영춘화와 민찔레, 미선나무는 자리에 따라, 계절에 따라 “곁에 두고 오래 보기” 좋다. 공간 자체는 식물보다 절대적이지 않다.
/// 도시의 원예와 식물의 취향
‘식물의 취향’이란 단어들의 조합은 얼마간 중의적이다. 그것이 식물에 관한 취향인지, 식물 자신의 취향인지는 늘 불분명하거나, 그 경계가 모호한 상태로 있다. 식물을 기른다는 것, 단지 생명 유지의 차원을 넘어 그것을 가꾸기까지 한다는 것, 곧 원예란 인간의 입장에서 식물이 좋아하는 빛과 흙과 바람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며 ‘식물 자신의 취향’을 파악하고 존중하는 일인 동시에 그것에 인간의 미감을 반영함으로써 ‘식물에 관한 취향’을 조성해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원예라는 행위는 취향의 사전적 의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에 도달한다. 관계가 형성되고, 밀도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응당 자연스러워야 하지만, 아무런 노력 없이 달성되는 종류의 자연스러움이라기보다 부단한 관심을 기울여가며 비로소 이뤄진 상태를 끊임없이 유지해야 하는 ‘인위적’ 자연스러움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모순적 속성에서, 원예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성이 개입되지 않은 (대)자연을 접할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감각, 이를테면 예술성을 체험하게끔 한다. 거기에는 원예가의 눈과 마음이 담겨 있다.
이런 원예의 모순성이 극대화되는 곳 가운데 하나는 도심일 것이다. 흙 한 줌 쥐어보기 어려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의 세계에서조차, 빛 한 폭 들지 않는 골방에서조차, 창틀에 놓인 작은 화분에서 볼품없이 웃자란 식물의 모습으로라도 인간은 원예 비슷한 행위를 하고야 만다. 원예가 박기철의 가드닝 스튜디오는 그런 도시 한복판에 있다. 분주하고, 어수선해서 도대체 호흡이란 게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광화문과 동대문 사이 어딘가에 미선나무, 영춘화, 백화등, 능소화, 마삭줄, 등나무 같은 야생 초목이 모여 있다. 아침과 오후, 해거름의 빛이 계절에 따라 제 나름의 동선으로 움직이면 거기에 호흡을 맞추어 식물은 식물대로 잎과 가지를 늘어뜨린 채 살아 있는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이곳의 원예는 도시의 정취에서 얼마간 비껴나 있다. 그것은 자연을 이식하거나 재현한 듯 ‘식물 자신의 취향’에만 심취해 있지도, 가화假花나 화환, 살 수 없는 곳에 놓인 화분처럼 한쪽이 몰취향화된 ‘식물에 관한 취향’에 압도돼 있지도 않다. 오히려 앞서 언급한 모순성의 지점, 달리 말해 그것들이 어울릴 수 있게 되는 좌표에 서 있다.
“처음부터 어떤 의도를 가지고 관찰하지 않는 건 나름의 원칙이 되었다. (…) 그에게 원예란 생명과 죽음, 성장하는 식물과 정물이 된 식물, 서로 다른 품종 간의 조화, 분재 기법을 활용해 ‘자연을 만드는 자연’을 찾아가는 과정과 다름없다.” 이 책의 ‘식물에 관한 어떤 말들’은 그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원예가가 원예 아닌 다른 무엇―시간의 질감과 생활의 음영과 관계의 집산과 그 밖의 다른 것들로 보여주는 ‘식물의 취향’에 대한 주석이다.